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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뭉치 무장들

임용한 | 36호 (2009년 7월 Issue 1)
1407년 12월 서울의 시장 거리(종로인 듯하다)에서 수십 명이 한데 엉켜 난투극을 벌였다. 불량배들의 패싸움이 아니라 조선의 고위 무장과 일급 무사들이 벌인 결투였다. 그것도 말을 타고 창대를 휘두르며 벌인 대결이었으니 상당한 볼거리였다. 평생에 보기 드문 액션 활극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싸움의 주인공은 종3품 대호군 황상과 지금의 서울 시장 격인 판한성부사(한성판윤) 겸 우군 총제 김우였다. 김우는 궁중을 지키는 시위 무사인 갑사 10명과 개인 수행원 2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황상 일행이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혼자였던 것 같기도 하고 부하들을 거느렸던 것 같기도 한데, 수적으로 열세임은 분명했다. 

난투극은 황상에게 불리하게 진행됐다. 김우 편에는 일급 무사인 갑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갑사 한 명이 황상의 은제 허리띠를 쳐 말에서 떨어트렸다. 그나마 날 선 무기는 사용하지 않고 창 자루나 장대를 들고 싸운 게 다행이었다.
 
황상은 개국공신인 황희석의 아들이다. 황희석은 중이었다가 환속해 태조 이성계의 부하가 된 인물로, 태조를 측근에서 모신 심복이었다. 김우도 신분은 낮았지만 태종의 총애를 받아 출세한 무장이었다. 출신과 환경이 비슷한 두 사람이 싸운 원인은 한 명의 미녀 때문이었다.
 
그 미녀는 ‘기쁨을 주는 아이’라는 뜻의 ‘가희아(可喜兒)’라는 이름의 기생이었다. 황상이 이 여인을 자신의 첩으로 들어앉히자 김우가 격분했다. 왕(당시 태종)의 기생을 첩으로 삼는 행위는 불법이기도 했다. 김우는 궁을 경비하던 갑사들을 보내 황상의 집을 강제 수색하고, 다음 날 기어이 가희아를 찾아 납치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상은 긴 몽둥이를 들고 가희아를 구출하기 위해 말을 달렸다. 그리하여 싸움이 벌어졌다.
 
고위급 무신들의 추태
오늘날로 치면 거의 차관급 관료들이 이런 싸움을 벌였으니 보통 추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김우와 황상은 형식적 처벌만 받았다. 알고 보니 태종도 가희아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 사건 후 태종은 가희아를 확실하게 차지하기 위해 아예 궁에 들어앉혔고, 황상과 김우는 곧 복직했다.
 
황상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413년 국왕을 경호하다가 술에 취한 무장 권희달에게 구타당했다. 태종이 총애하던 권희달은 술버릇이 고약해 구타 사건을 일으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서리나 부하들을 두드려 팬 일은 수도 없다. 국가 기록과 역사를 정리하기 때문에 문관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는 춘추관의 문신을 때린 적도 있었다. 그의 구타 사건은 정말 끝이 없었다. 몇 번이고 그를 봐주던 태종이 ‘나이도 들만큼 들었는데 아직 버릇을 고치지 못하느냐’고 한탄할 정도였다.
 
한참 세월이 흐른 1428년(세종 10년), 이제는 병조판서까지 역임해 재상급 관원이 된 황상이 노비들을 끌고 도총제 이순몽의 집을 급습했다. 이순몽은 세종의 총애를 받던 전쟁 영웅이었다. 대마도 정벌 때 조선군이 왜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 하나가 궤멸될 뻔한 적이 있었다. 후방에 있던 부대들은 이 광경을 보고도 겁이 나서 출전하지 못했다. 이때 이순몽이 용감하게 부대를 끌고 출전해 왜군을 격퇴했다. 나중 일이지만, 세종 때 시도한 두 번의 여진 정벌 때도 이순몽의 부대가 최고의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도 술만 들어가면 누구 못지않게 난폭하고 안하무인이었다. 이미 태종 때부터 권희달의 후계자는 이순몽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정몽주의 아들 정종성이었다. 마침 권희달이 근처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 정종성을 구타해 또다시 사건을 일으켰다.
 
황상이 이순몽을 덮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첩 월하봉(月下逢)과 사통했기 때문이다. 과거 권희달에게 구타당한 적이 있던 황상은 이날 권희달의 후계자에게 복수했다.(사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였다) 현장을 붙잡은 황상은 이순몽과 월하봉의 옷을 벗기고 머리를 밀어버렸다. 이순몽이 잘못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처럼 사적으로 보복하는 일은 분명한 범법 행위요, 폭행이었다. 그것도 전임 국방부 장관이 전임 사단장이자 전쟁 영웅을 붙잡아 공개적인 창피를 준 셈이니, 요즘 같으면 국가적 망신이었다. 아버지 태종은 황상과 권희달을 끝까지 보호했지만, 세종은 법과 원칙에 훨씬 철저했다. 그는 이 보고를 받자 황상과 이순몽을 당장 파직하고 지방으로 유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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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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