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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중국의 고질적 콤플렉스 꺾은 ‘장점’에 대한 통찰

임용한 | 17호 (2008년 9월 Issue 2)
자신들의 국가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는 중국인들도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바로 변방 유목민족과의 전쟁에서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콤플렉스를 가질 만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흉노 정벌에 나선 한고조 유방은 흉노족에게 포로가 될 뻔했다가 뇌물을 쓰고 겨우 빠져나왔다. 또 한고조가 죽은 뒤 권력을 장악한 여후는 흉노 왕으로부터 결혼하자는 편지를 받았다. 이 모욕적인 제안에 대해 여후(呂后·한 고조의 황후)는 “나는 너무 늙어서 결혼할 수 없다”고 공손하게 거절해야 했다. 당태종의 부친 이연은 황제가 되기 전에 돌궐이 압박해 오자 돌궐 왕에게 스스로 신(신하)이라는 호칭을 쓰며 화해를 청한 적도 있다. 천하의 영락제도 몽골 원정을 갔다가 큰 피해를 보고 막사에서 죽었다. 이 밖에도 중국은 변방 유목민족들로부터 숱한 수모를 당했다. 한무제와 당태종이 중국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도 서역 원정에서 승리한 거의 유일한 군주이기 때문이다.
 
중국군이 주변 유목민족을 두려워한 이유는 그들의 기병 때문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만 해도 중국에는 기마술이 널리 보급되지 않아 기병보다는 전차를 주로 활용했다. 전차는 지형의 제약을 많이 받고 선회하기 어렵기 때문에 보병에는 강하지만 기병의 기동력을 당할 수 없고 전술적 응용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전차 중심의 전력으로는 기병에 의존하는 유목민족을 당해내기 어렵다.
 
유목민족의 월등한 기동력
말도 문제였다. 진시황의 병마용에서 출토된 진나라의 군마를 보면 머리가 크고 몸통과 다리가 굵다. 진나라와 가까운 중국 북서부 간쑤성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품종으로 추정되는 이 말은 중국 본토에서 생산되는 말보다 우수한 품종으로 알려져 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무적 군대의 명성을 누린 데에는 이 말이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무제가 흉노족과 싸우기 시작하자 이야기는 달라진다. 흉노족이 타는 중앙아시아나 아랍종 말은 머리가 작고 다리가 길며 몸 전체가 유선형이다. 중국의 군마는 전차를 끌기에는 적합하지만 서역 말의 속도를 당할 수가 없다. 한무제가 흉노를 정벌할 때 월등한 기동력으로 움직이며 활을 쏘아대는 흉노족 경기병 3명에게 중국 기병 100명이 거의 전멸한 적도 있다.
 
물론 주변 민족의 영향을 받아 중국군도 전차 대신 기병을 활용하면서 중국군과 유목민족의 군대 편제와 전술이 비슷해졌다. 그러나 우수한 기병을 보유한 유목민족 군대가 훨씬 강할 수밖에 없었다. 유목민과의 전쟁이 벌어지면 중국군은 기병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무제는 피땀을 흘린다는 한혈마를 구하기 위해 서역 원정까지 감행했다. 고생 끝에 말을 조달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것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좋은 말을 구했다고 해서 좋은 기병을 양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입한 말을 키우고 훈련시킬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무제가 승리할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흉노족의 내분이었다. 흉노족은 인도유럽어족 계열의 중앙아시아 민족과 몽골족 계열 등 여러 종족의 혼합체였다. 이들이 분열하면서 일부가 한나라로 귀순, 흉노 정벌에 참전한 것이다.
 
당태종의 돌궐족 정벌과 티베트 원정은 중국군이 유목민족을 상대로 제대로 된 승리를 거둔 사례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이 전쟁에서 패한 돌궐이 서쪽으로 밀려났고, 이것이 훈족(흉노족)의 대이동 이후 다시 한 번 유럽사를 바꾼 투르크족 대이동의 시작이 됐다.
 
비록 최후의 원정인 고구려와의 전쟁에 실패하는 바람에 체면을 구겼지만, 수양제의 실패와 당태종의 실패는 질이 다르다. 수양제의 군대는 고구려군에 몰살을 당했지만, 당태종의 경우 안시성 공략에 실패하면서 주어진 시간 내에 전쟁을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즉 당태종은 전쟁에서는 졌지만 전투에서는 대부분 이겼다. 주필산 전투에서는 단 하루 만에 고구려군 주력 5만 명을 궤멸시키기도 했다. 전투에서 이기는 것과 적을 섬멸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데, 고구려로서는 치명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완패를 당한 것이다.
 
이런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낸 사람이 바로 이정(李靖·571649)이다. 수나라 관리이던 이정은 당태종이 장안을 점령한 뒤 그의 부하가 됐다. 특히 돌궐 원정에서 돌궐 왕 힐리가한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당나라 최고 명장이 됐다. 그는 체계적인 병서를 남기지 않아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그의 개혁은 16세기 화약무기가 보편화하기 전까지 중국군의 표준 전술로 자리를 잡았다.
 
중국군의 장점 극대화
이정 개혁안의 첫 번째 특징은 중국군의 장점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점을 살린다는 아이디어는 결코 새로운 생각도, 특별한 교훈도 아니다. 단점을 보완하는 것보다 장점을 살리는 것이 먼저라는 주장은 예전에도 많은 사람이 했을 것이다. 사실 장점을 살리는 것과 단점을 보완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우선이냐는 논쟁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다.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어느 쪽이 옳은가는 주어진 상황이 결정한다.
 
전통적으로 유목민족은 기병, 중국군은 보병에 각각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중국군 보병이 탁월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기보다 인구(병력)가 워낙 많아서 보병이 장점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 가운데서도 굳이 특장점을 찾으면 노병이 있다. 노병은 쇠뇌(석궁)를 사용하는 병사를 말한다. 중국군은 활의 성능과 궁술이 유목민족에게 뒤졌기 때문에 활 대신 석궁을 사용하는 노병의 비중이 높았다. 석궁은 두 손, 때로는 발까지 사용해야 하고 무겁기 때문에 기병들에게 불편해서 유목기병들은 활을 애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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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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