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가 되면 사람들은 연하장을 보내고 그동안 신세 진 사람들에게 감사의 선물을 전하느라 분주하다. 덕분에 침체된 경제도 잠시나마 활기를 되찾는 듯 보인다.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받지 않는다면 시장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받기 시작한 것은 서기 700년께라고 한다. 그러나 원시 조상들도 사랑하는 연인에게 코끼리뼈를 조각하고 들꽃을 선물하지 않았을까? 부모님이나 사랑하는 연인, 고마운 분들께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뚱맞은 질문 하나만 던져 보자. 선물은 진정 말 그대로 선물일까, 일종의 교환일까. ‘진정한 베풂’은 무엇이든 돌려받겠다는 계산이 깔리지 않는 행위다. 그렇다면 선물은 진정한 베풂일까, 교환행위일까. 얼핏 실없는 질문 같아 보이지만 이 질문은 철학적 논제이기도 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선물’은 본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선물이 보답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선물이 아니고 교환의 시작이며, 거리의 노숙자에게 돈을 줄 때 선물을 준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거저 주는 것이라면 그 또한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질적으로 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주고받아온 것일까.
‘왜 사랑에 빠지면 착해지는가’의 저자이자 덴마크의 과학저술가 토르 뇌레트란데레스는 ‘구두’라는 똑같은 제품이라 하더라도 선물일 때와 상품일 때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물건을 사고파는 상품 판매는 판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거래를 하는 순간에 볼일을 다 본 셈이므로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선물이 오가면 그들 사이에 남는 것이 있다. 선물은 ‘관계를 맺고 싶다’라는 값비싼 신호이기 때문이다. 연인들이 사랑에 빠진 ‘초기’에 그토록 선물에 신경을 쓰는 이유도, 결혼 30년 차 부부들이 선물에 그토록 무심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선물은 관계를 형성한다.
데리다의 말처럼 애초에 선물이란 말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지만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시간’이란 요소를 도입해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다. 선물 교환은 교환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시간 차이를 두고 교환하는 행위다. 그래서 베풂의 성격을 담는다. 그에 따르면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비연속적 베풂의 행위’이다.
어느 사회에서든 받은 선물에 대해 곧바로 답례하는 것은 ‘받은 선물을 거절하는 것과 다름없는 결례’라고 여기는 문화가 있다. 답례를 하지만 그 자리에서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간격을 두고 교환을 하는데, 그 시간 차이가 관계를 형성한다는 얘기다. 선물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답례하면 “당신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요”라는 뜻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생일에 선물했다면 나는 그 답례를 내 생일 때 받게 된다. 물론 이 동안에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