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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우유 제조일자 표시

선명하게 찍힌 ‘제조일자’, 판을 바꾸다

김남국 | 47호 (2009년 12월 Issue 2)
“제조일자 12.07. 01:00”
 
서울우유가 흰 우유 제품 상단에 표시한 이 몇 글자가 시장에 지각 변동을 불러왔다. 소비자 입장에서 이런 변화는 사소해 보인다. 글자 몇 개를 추가로 찍은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마케팅 전공 대학 교수와 전문가 등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서울우유 마케팅은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주고 시장의 경쟁 구도를 바꾼 성공 사례로 꼽혔다. 실제 이 마케팅 실행 과정에는 준비 기간만 1년 반이 걸렸고 전사적 인식과 행동을 바꿔야 했다. 실무자들은 ‘대역사’였다고 자부한다.
 
 

 
서울우유 마케팅의 시장 파급 효과도 상당했다. 서울우유의 하루 평균 판매량은 800만 개 정도였으나 제조일자를 병기한 7월 이후 900만 개를 넘어섰고 한때 1000만 개를 돌파하기도 했다. 서울우유가 실시한 광고 효과 조사에서 응답자의 64%가 제조일자를 확인했고, 이 가운데 98%는 제조일자 표기가 구매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대답했다.
 
제조일자를 표기한 단순해 보이는 마케팅이 왜 이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제조일자 표기 마케팅을 주도한 서울우유 노민호 마케팅 본부장과의 심층 인터뷰, 각종 문헌 및 자료 조사 등을 토대로 서울우유 마케팅의 의미와 성공 요인을 분석했다.
 
 
아이디어의 원천은 고객 관찰
제조일자 표기 아이디어는 고객에 대한 관찰에서부터 나왔다. 대형 마트 등에서 우유를 사는 고객을 관찰하던 서울우유 마케팅 팀원들은 이상한 소비자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우유를 사기 전에 여러 제품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제품을 고르는 소비자가 많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런 소비자들은 유통 기한을 확인하고 있었다. 서울우유는 현장 조사 등을 통해 구매 날자와 유통 기한의 차이를 계산해서 유통 기한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은 제품을 고르는 소비자가 전체의 30%에 달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소비자들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유통 기한이 많이 남아 있을수록 더 신선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신선한 우유는 몸에도 좋고 냉장고에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 그만큼 소비자들에게 더 큰 가치를 준다.
 
하지만 유통 기한을 확인하는 소비자들의 행동은 신선함 추구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서울우유는 잘 알고 있었다. 각 우유 제조업체마다 유통 기한이 달랐기 때문이다. 같은 회사 제품이라도 유통 기한이 다른 사례가 있었다. 유통 기한이 10일 남았다 하더라도, 바로 어제 생산된 제품도 있고, 5일 전에 생산된 제품도 있었다는 의미다. 결국 소비자들은 ‘모든 회사의 유통 기한은 같다’라는 잘못된 전제하에서 신선한 제품을 고르고 있었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제품에 제조일자를 표기해주면 된다. 그러면 소비자들은 제조일로부터 며칠이 지났는지 쉽고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서울우유가 신선도에 대한 고객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은 2006년이었다. 하지만 실제 실행에 들어간 것은 4년여가 흐른 후였다. 단순해 보이는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데 왜 이처럼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조직 내부의 거센 반발
2006년께 신선도에 대한 고객의 욕구를 파악했지만, 추진 주체가 돼야 했던 마케팅 담당자가 다른 부서로 자리를 옮기면서 아이디어는 사장됐다. 이후 노민호 본부장이 2008년 마케팅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해 3월 관련 부서를 아우르는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 본격적으로 제조일자 표기 방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제조일자를 표기하자는 아이디어는 조직 내부의 거센 역풍을 불러왔다. 무엇보다 제조일자는 각 기업의 핵심 기밀 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당연히 “현재 상황에서도 제품이 잘 팔리고 있는 데다 고객들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굳이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제조일자를 밝혀서 출고된 지 오래된 제품의 경쟁력을 스스로 떨어뜨릴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이 제기됐다. 이에 마케팅 팀은 “고객을 속일 수는 없다. 오류가 있는 것을 바로잡고 고객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게 장기적으로 신뢰 수준을 향상시켜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논리로 설득했다.
 
생산과 유통 담당 부서는 더욱 거세게 반발했다. 직접적으로 업무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제조일자를 표기하면, 제조 시간을 바꿔야 했다. 회사 전체적으로 신선도 측면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생산 시간대는 새롭게 날짜가 바뀌는 자정부터였다. 자정부터 오전 시간대까지 최대한 많은 양의 제품을 생산해서 유통망에 공급해줘야 소비자들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또 제조일자가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에 휴일에도 공장을 놀릴 수 없었다. 야근과 휴일 근무의 밀도와 강도가 대폭 늘어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생산 부서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유통 분야에서도 격변이 나타날 게 확실했다. 생산 즉시 출하가 이뤄져야 하고, 물건이 도착하자마자 판매장에 제품을 올려놓아야 경쟁력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유통 기한만 표시됐을 때 대리점들은 보통 하루 이틀 정도의 물량을 비축해두고 있었다. 갑자기 수요가 생기더라도 마음 편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조일자가 표시되면 이런 관행을 바꿔야 했다. 하루 이틀 창고에 보관하면 그만큼 제품 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재고 물량 비축이 어렵기 때문에 생산 부서에서도 여유가 없어졌다. 따라서 하루 전에 해왔던 생산 주문도 이틀 전에 해야 했다. 이래저래 유통 담당자들의 업무 강도가 훨씬 높아졌다.
 
제조일자 표기에는 고정 투자비도 들어간다. 추가 프린트 작업을 위한 기계 설비를 마련해야 했다. 생산 즉시 출하와, 출하 즉시 판매를 구현하려면 운송과 배송 수요가 이전보다 늘어나기 때문에 차량 대수와 운송 횟수도 늘려야 했다. 생산 공장에서는 공휴일과 야간 근무로 인한 인건비 추가 부담이 발생했다. 총 소요 비용은 20억 원 정도로 추산됐다.
 
마케팅 팀은 사내 반발에 맞서 “고객을 만족시키면 물건이 더 많이 팔릴 것이고, 그만큼 기업 이익이 커지면 그 보상이 직원들에게 돌아간다”는 논리로 이들을 설득했다. 또 시장 개방으로 인한 외국 낙농회사의 한국 진출 등 외부 환경 변화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일본은 북해도에서 우유가 많이 생산되는데, 이 지역에서 배로 우유를 싣고 본토로 가는 시간과 같은 시간에 동해로 물건을 보낼 수 있다. 북해도 우유 생산업체 입장에서 일본과 한국은 사실상 같은 경제권이란 의미다. 또 뉴질랜드 업체들도 언제라도 한국에서 영업을 시작할 수 있다. 아직은 내수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지만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면 중국 업체들까지 한국 시장에서 경쟁자로 부상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낙농업을 보호하려면 한국 업체만의 고유한 경쟁력을 갖춰야 하고, 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대안은 신선도라는 점에 주목했다. 마케팅 팀은 외국 업체의 공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신선도를 강조하는 제조일자 마케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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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남국

    김남국[email protected]

    - (현)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장
    -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편집장
    -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정치부 IT부 국제부 증권부 기자
    - 한경가치혁신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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