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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살기의 미학, 이탈리아 오르비에토

김민주 | 58호 (2010년 6월 Issue 1)

‘비즈니스(business)’라는 영어 단어는 ‘busy’라는 형용사에 ‘ness’를 합친 명사형이다. 바쁘고 빠른 것 자체가 사업이고 경제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바쁘지 않으면 ‘비즈니스’가 아닌 셈이다.
 
세상은 숨 가쁘게 돌아간다. 개인의 일상도, 기업 환경도 그렇다. 하지만 이런 광속 트렌드의 한쪽에서 ‘느림(slowness)’이라는 역() 트렌드도 부상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슬로라이프(slow life)’ 트렌드는 이제 소수 계층의 특이한 성향이 아니라, 특정 계층과 집단을 규정하는 하나의 차별화된 포인트가 됐다.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도시들의 확산 현상도 예사롭지 않다.
 
느리게 살기, ‘슬로라이프’의 미학
슬로라이프 트렌드는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에서 시작됐다.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날드가 1986년 이탈리아 로마 시의 스페인 광장에 매장을 내자 이탈리아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지역 고유의 전통 음식을 지키려는 모임이 곳곳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7년 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브라시 출신으로 음식 와인 저널리스트인 카를로 페트리니를 비롯한 62명이 슬로푸드 선언을 발표했다.
 
슬로푸드 운동은 세를 불려 나갔다. 1999년 10월 오르비에토와 인근의 그레베 인 키안티, 포스타노, 브라 등 이탈리아 네 개 도시의 시장들이 음식에만 국한하지 말고 도시의 삶 전체에 느림을 도입하자고 뜻을 모았다. 이들이 내건 슬로건은 이탈리아어로 ‘치타렌타(Citta Lenta)’나 ‘치타슬로(Citta slow)’라고 불리는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이었다.
 
슬로시티의 로고는 마을을 등에 지고 가는 달팽이의 모습이다.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가자는 상징이다. 이 운동의 목적은 인간 사회의 진정한 발전과 ‘오래갈 미래(ancient future)’를 위한 두 가지, 즉 자연(nature)과 전통문화(culture)를 잘 보호하면서 경제도 살려 진짜 사람이 사는 따뜻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래서 슬로시티국제연맹의 모토도 편한 삶, 즉 삶의 질을 위한 국제적인 연결망을 뜻하는 ‘International network of cities where living is easy’다. 그렇다면 슬로시티 운동의 지향점은 무엇일까. 첫째 철저한 자연생태 보호, 둘째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 셋째 천천히 만들어진 슬로푸드 농법, 넷째 지역 특산품과 공예품 지키기, 다섯째 지역민 중심의 지방의 세계화, 즉 ‘세방화(glocalization)’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슬로시티의 본산, 오르비에토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를 관통하는 테베레[Tevere, 영어로는 티베르(Tiber)]강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움브리아(Umbria) 지역이 나온다. 이탈리아 반도의 거의 중간에 위치한 이 지역에는 주도인 페루자(Perugia)를 비롯해 고색창연한 도시 아씨시(Assisi)와 인구 2만 명의 조그마한 도시 오르비에토(Orvieto)가 있다.
 
오르비에토는 해발고도 195m의 바위산 위에 있는데 900년 역사를 가진 성벽이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천애의 요새 같은 분위기가 물씬 난다. 그래서 이른바 ‘하늘도시’라고 불린다. 이 지역은 기원전 에트루리아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의 12개 도시 중의 하나다.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져 있다. 기차로 1시간이면 갈 거리다.
 
이곳에는 오랜 역사가 만들어낸 멋진 관광지도 많다. 연간 방문객이 2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예수의 수의가 보관돼 있는 두오모 대성당과 그 앞의 드넓은 광장이 유명하다. 두오모란 ‘신의 집’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로마 이외의 지방에서는 주교가 상주하는 마을의 대표 성당을 뜻한다. 오르비에토의 두오모는 1290년부터 300여 년에 걸쳐 세워졌다. 이 도시에는 에밀리오 그레코 박물관, 포폴로 광장, 건축가 상갈로가 만든 산 파트리치오(성 패트릭)의 우물 같은 볼거리가 많다. 이 도시의 지하는 미로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도시다. 아주 옛날 사람들은 이 화산암 지대에 굴을 파고 살았다. 굴 안에는 우물, 가축 사육장, 방앗간 등 다양한 시설들이 갖춰져 있다. 이곳은 또 중세부터 빚어진 단맛이 도는 황금빛 백포도주인 오르비에토 산지로 유명하다.
 
해발 195m에 위치한 이 요새 같은 도시로 가는 방법은 독특하다. 한 때는 자동차로 갈 수 있었는데 차량 통행이 늘어 지반에 균열이 생겼다. 그래서 요즘은 자동차로는 갈 수 없다. 산 밑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걸어가든지 케이블카나 푸니콜라레라는 협궤기차로 이동해야 한다. 19세기 만들어진 케이블카는 자동차에 밀려 폐물이 되다시피 했지만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이 케이블카로 연간 140만 명의 관광객을 실어 나른다.
 
자동차 통행은 여느 도시보다 크게 적어 한적한 느낌을 준다. 대신 느긋하게 파세자타, 즉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을 거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르비에토 사람들은 자동차 통행이 늘면서 지반에 균열이 생기고, 미국식 패스트푸드 문화가 침투해오자 전통과 생활양식을 지키기 위해 슬로시티를 선택했다. 슬로시티국제연맹 본부도 이 도시에 있다. 주민들은 자신의 농장에서 야채를 직접 기르고, 가축도 사육한다. 농장이 없는 주민들도 공동텃밭을 가꾼다.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에 열리는 장터에서 이렇게 만들어진 신선한 과일, 채소, 치즈 등이 거래된다. 대형 슈퍼마켓이나 할인점은 없다. 이 지방의 특산품인 오르비에토 와인 등을 판매하는 와인가게, 주민들이 손수 만든 수제품 상점들이 거리의 상가를 채우고 있다. 100년 넘은 유명한 빵집에서는 방부제 없는 재료로 만든 빵과 케이크도 판매한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현란한 간판도 눈에 띄지 않으니, 시각적 공해도 없다. 거리에서 밤하늘을 감상할 수 있을 정도다.
 
슬로시티의 철학은 오르비에토 주민들의 문화와 행동양식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도시에서 이유 없이 싸우거나 소리를 지르면 곧바로 잡혀간다. 악바리처럼 살지 않고 느긋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렇다고 문을 꽁꽁 닫아걸고 전통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전통을 중시하되 건강한 음식과 생활양식을 받아들여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오르비에토 슬로시티의 목적이다.
 
슬로시티의 성공 모델
오르비에토가 슬로시티라는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도시를 둘러싼 환경 변화에 대한 민첩한 대응이다. 오르비에토는 관광객과 자동차가 도시로 몰려들고 글로벌 패스트푸드업체가 침투하면서 도시의 전통과 정체성이 흔들리는 위기에 직면했다. 이 상황에서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장기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전략으로 슬로시티를 선택했다. 친환경 먹을거리인 슬로푸드에 대한 트렌드를 포착하고 이를 슬로시티라는 라이프스타일 콘셉트로 확장시킨 것이다. 도시 자체가 역사, 문화유산, 생활방식 등의 고유한 자산을 활용해 슬로라이프를 실천하는 연구개발(R&D) 센터가 됐다.
 
둘째, 슬로시티 콘셉트를 이탈리아의 다른 세 도시와 연대해 추진한 것도 성공 요인이다. 소도시 하나의 노력만으로는 슬로라이프라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널리 전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향점과 주어진 여건이 비슷한 이탈리아 소도시와 연대해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갔다. 연계와 협력을 토대로 ‘슬로시티’를 국제적인 라이프스타일 트렌드의 하나로 키워나갔다.
 
셋째, 슬로시티 요건을 규정한 인증제도를 마련하고, 이를 세계 표준으로 확장한 것도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각 지방자치단체가 슬로시티 국제인증을 받으려면 슬로시티국제연맹 심사단의 까다로운 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모두 24개 항목을 심사하는데 특히 5개 핵심 항목을 집중 검토한다. 인구는 5만 명보다 적어야 하고, 자연환경과 전통적인 산업이 잘 보전돼 있어야 하며, 환경친화적인 농사법으로 재배되는 지역 특산물이 있어야 한다. 패스트푸드점이나 대형 슈퍼마켓도 없어야 한다. 지자체가 인증 신청을 하면 슬로시티국제연맹이 해당 지역을 직접 실사하며 꼼꼼히 점검한다. 슬로시티로 선정되기까지 6∼10개월이 걸린다. 슬로시티로 선정되더라도 4년마다 재심사를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슬로시티국제연맹 등 국제기구를 유치해 슬로시티의 본산이라는 도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었다. 특정 분야의 허브가 되려면 ‘앵커(anchor) 조직’으로 관련 분야 대학, 국제기구, 기업이나 단체의 지역본부 등을 유치할 필요가 있다. 오르비에토는 슬로푸드 운동의 국제본부인 이탈리아의 브라가 치즈 축제, 슬로푸드 영화제, 국제슬로푸드상 시상식 등을 개최하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어 슬로시티국제연맹의 본부를 유치했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슬로시티
2009년 말 현재 17개국 123개 도시가 슬로시티로 선정됐다. 이탈리아가 67개로 가장 많다. 이어 영국이 8개로 2위, 한국과 스페인이 6개로 공동 3위다. 그 뒤로 폴란드가 5개, 벨기에와 포르투갈이 4개, 노르웨이와 오스트리아가 3개, 호주가 2개, 네덜란드, 캐나다, 덴마크, 스웨덴, 뉴질랜드가 각각 1개다.
 
‘빨리빨리 문화’로 알려진 한국에 슬로시티가 6곳이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이탈리아의 슬로시티국제연맹은 2007년 전남 신안군 증도면, 완도군 청산면, 장흥군 유치면과 장평면, 담양군 창평면 등 전남지역 4개군을 슬로시티로 인증했다. 2009년에는 경남 하동군의 악양면과 충남 예산군의 대흥면과 응봉면이 추가됐다. 제주도도 올레길의 인기에 힘입어 슬로시티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에는 슬로시티가 한 곳도 없다는 점이 눈에 띈다.
 
슬로시티는 도시 브랜드를 알리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도시의 역사, 문화, 전통, 행동양식이 슬로시티 전략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무늬만 슬로시티’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혹시 한국의 슬로시티 열기가 지나치게 빨리 달아오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편집자주 한국 최고의 마케팅 사례 연구 전문가로 꼽히는 김민주 리드앤리더 컨설팅 대표가 전 세계 도시의 혁신 사례를 분석한 ‘City Innovation’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급격한 환경 변화와 거센 도전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도시를 운영한 사례는 행정 전문가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자들에게도 전략과 조직 운영, 리더십 등과 관련해 좋은 교훈을 줍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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