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ychology in Business
2010년 사회심리학 학술지인 <인성과 사회심리지(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8권 3호에 ‘눈에 띄는 녹색: 지위, 명성, 그리고 과시적 보호(Going green to be seen: Status, reputation, and conspicuous conservation)’라는 논문이 실렸다. 미국 미네소타대 블라다스 그리스케비시우스, 뉴멕시코대의 조슈아 티버, 네덜란드 로테르담 경영대의 브람 반덴벅 등 진화심리학을 경영학에 적용한 진화경영학자들의 공동연구였다.
이 논문은 하이브리드 자동차 시대를 연 도요타의 프리우스를 사례로 활용해 발표 당시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연구자들이 도요타의 프리우스에 주목한 계기는 2008년 3월 프리우스 누적판매량이 100만 대를 넘겼다는 발표였다. 100만 대는 1997년 12월 첫 하이브리드 모델 프리우스를 내놓은 지 12년 만의 기록이다. 휘발유와 전기를 함께 사용하는 하이브리드차인 프리우스의 성공비결을 언뜻 떠올리면 전기와 휘발유 혼용이라 연료 값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 하이브리드 차량이 나왔을 때만해도 차량가격이 동급모델에 비해 거의 2배나 비싸기 때문에 경제적 이유만으로는 프리우스의 인기를 설명하기 힘들다. 요즘이야 하이브리드 차량 가격이 많이 내려서 3, 4년만 타도 기름값이 빠진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20년 넘게 굴려야 기름값이 빠질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다.
또 다른 가능성은 프리우스가 친환경 차량이란 데서 찾을 수 있다. 연료를 적게 소모하는 만큼 공해의 원인이 되는 배기가스를 덜 배출한다. 환경에 민감한 소비자라면 차 값이 꽤 비싸더라도 배기가스를 덜 배출하는 하이브리드 차량을 구매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실제 프리우스 구매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환경에 대한 고려는 순위 밖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동차 시장조사 전문회사인 CNW마케팅리서치에 따르면 2007년 프리우스 구매자의 절반 이상(57%)이 “프리우스가 나를 말해주기 때문(it makes a statement about me)”을 주된 구매이유로 꼽았다. 배기가스 배출이 적기 때문이라는 사람은 25%에 불과했고 연료효율을 꼽은 사람도 36%에 그쳤다.
연료효율도 아니고 환경에 대한 고려도 아니라면 사람들은 왜 하이브리드 차량을 구매하는 것일까? 비싼 데다 엔진성능이 탁월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연구자들은 인간의 중요한 두 가지 심리적 본능인 이타적 행위와 지위에 대한 욕구를 꼽았다. 일반적으로 지위에 대한 욕구는 사치품소비와 관련이 있다. 고가의 명품소비가 개인 역량(지위와 부)을 과시하는 수단이 된다. 그런데 고가의 사치품 구매보다 이타적 행위인 친환경 제품 구매가 역량을 과시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설명이다. 역량을 과시하려면 그 역량을 나타내는 신호가 속일 수 없는 것이어야 하는데(가짜가 나타날 수 없어야 하는데) 자기 희생을 동반하는 이타적 행위만큼 정직한 신호는 없다.
역량의 과시와 이타적 행위
연구자들은 사회적 지위동기가 이타적 행위와 연관됐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 차례의 실험을 했다. 첫째 실험에서는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친환경 제품과 사치품 중 어떤 상품을 구매하게 되는지 살펴봤다. 연구자들은 168명의 대학생들을 세 그룹으로 나눴다. 첫째 집단의 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대기업에 취직해 승진하는 상황을 묘사한 이야기를 읽은 다음 상품을 선택하도록 했다. 호화로운 가구 등으로 장식된 사무실에서 동기들을 누르고 높은 자리로 승진하는 상황이 강조된 이야기다. 둘째 집단 학생들은 잃어버린 음악회 표를 집안에서 다시 찾은 후 친구들과 함께 음악회에 가는 상황을 묘사한 이야기를 읽고 상품을 선택하게 했다. 셋째 집단 학생들은 아무 이야기도 읽지 않고 바로 상품을 선택하게 했다. 이야기를 읽은 다음 두 종류의 자동차, 식기세척기, 가정용 세제 등을 함께 제시하면서 어떤 제품을 구매할 것인지 물었다. 자동차의 경우 친환경 제품으로서 3000만 원 상당의 승용차를 제시했다. 120마력 엔진출력에 공해를 유발하는 배기가스가 적다는 점을 강조했다. 선택사양으로는 일반적인 천 시트에 AM-FM라디오를 제공했다. 고급 제품으로는 같은 가격의 같은 브랜드의 승용차를 제시하면서 244마력 엔진출력을 강조했다. 가죽시트에 GPS항법장치, 스테레오오디오 등 고급스러운 선택사양을 제시했다. 두 종류의 제품 중 하나를 고르도록 한 상황에서 사회적 지위동기가 작동한 학생들의 경우 절반 이상(54%)이 친환경 제품을 선택했다. 반면 음악회 표 이야기를 읽거나 아무 이야기도 읽지 않은 사람들은 37%만이 친환경 제품을 선택했다.
친환경 제품 구매가 사회적 지위 과시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두 번째 실험을 했다. 이번엔 구매상황을 공개와 비공개 두 가지로 구분했다. 역량을 과시하는 게 친환경 제품 구매의 주요 동기라면 구매를 목격하는 사람의 존재유무가 친환경 제품 구매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93명의 학생들을 공개/비공개 상황에 놓은 다음 친환경 제품과 사치품을 고르도록 했다. 공개상황에서는 상점이나 대리점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상황을 상상하도록 했다. 비공개 상황에선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상황을 상상하도록 했다. 구매할 상품으로는 가방, 건전지, 램프 등을 제시했다. 첫 번째 실험과 마찬가지로 같은 가격대의 같은 브랜드를 제시하면서 친환경 제품은 환경친화적 요인을 강조했다. 사치품은 고급스러움을 강조했다. 결과는 예측대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있는 실물 상점에서 구매할 때 친환경 제품의 선호도가 높았다. 아무도 봐주는 사람이 없는 온라인 상점에서 구매할 때는 친환경 제품의 선호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세 번째 실험에서는 친환경 제품을 20%나 더 비싸게 제시했다. 역량 과시가 친환경 제품 구매의 주요한 동기라면 가격이 비쌀수록 잘 팔려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지 않은 사람들은 비싼 친환경 제품보다 가격이 저렴한 일반 상품을 선호했다. 반면 사회적 지위를 생각한 사람들은 20%를 더 지불하면서 친환경 제품 구매를 선택했다.
경쟁적 이타주의
인간의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 tion)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베블렌(Veblen)은 고가의 사치품은 지위를 과시하는 데 쓰인다고 이미 100여 년 전에 간파했다. 베블렌 이후 경제학자들이 풀지 못한 의문은 지위의 과시와 이타적 행동과의 관계다. 친환경 제품 구매 같은 이타적 행위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들 개인의 생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진화심리학자들은 경쟁적 이타주의(Competitive Altruism)로 지위 과시와 이타적 행위의 관계를 설명한다. 인간의 생존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개체가 살아 남는 것과 함께 개체가 속한 집단도 생존해야 한다. 이기적인 구성원만으로 채워진 집단은 이타적 구성원으로 채워진 집단을 이길 수 없다. 이기적 개인만 있는 집단은 생존 경쟁에서 밀려 무대에서 사라진다.
진화심리학이란? 진화심리학은 진화생물학의 원리를 사회과학에 적용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전통 사회과학의 패러다임이 근인적 설명(proximate account)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이 이뤄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어떻게)을 제시하는 데 유용한 반면 진화심리학의 패러다임은 원인적 설명(ultimate account)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이 왜 형성됐는지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진화심리학의 기본 원리는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한다. 수백만 년 동안 인류가 자연환경과 사회에 적응, 생존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신체구조가 형성되듯 심리기제도 같은 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본다. 예를 들어 물개는 분명히 개의 일종인데 몸은 물고기의 형상과 유사하다. 이는 물개가 적응해야 하는 환경이 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적응해야 하는 환경은 무엇일까? 사회다. 사람은 인간(人間)이란 말 자체가 의미하듯 극도의 사회적 존재이다. 사회를 이루고 살기에 인간은 효과적으로 자연에 적응했는데 바로 사회를 이루고 산다는 그 사실 때문에 역으로 사회적 존재 특유의 심리기제가 형성됐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현생 인류의 심리기제 대부분은 최근 수십만 년 동안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에서 소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생존에 관련된 핵심문제(개체와 종의 보호 및 번영)를 반복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뇌는 자기보호, 연애, 결혼, 양육, 연대, 경쟁 등 특정 문제를 해결하는 심리적 단위(module)가 생겼다. 따라서 진화심리학자들은 자기보호, 연애, 결혼, 양육, 연대, 경쟁 등의 문제해결에 관련된 심리를 연구하면 이타적 행동, 아름다움, 쾌락, 범죄 등 인간의 행동과 의사결정에 얽힌 비밀을 풀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은 개체생존을 위한 이기적 본능과 함께 소속 집단의 생존을 위한 이타적 본능도 함께 지니게 됐다. 인간사회에서 명성이 자리잡게 된 것도 집단의 생존을 위한 이타적 본능의 결과다. 집단은 좋은 명성을 갖고 있는 개인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보상을 제공한다. 명성이 뛰어난 개인은 신뢰가 높을 뿐 아니라 높은 지위를 얻는 데도 유리하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지위를 놓고 경쟁할 때 이타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한다. 선거 때면 재산헌납을 공약으로 내거는 것이나 세계적 부자들이 거액을 기부하는 것도 진화심리의 산물이다.
이 연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에 많은 점을 시사한다. CSR활동은 위대한 기업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즉, CSR한다고 모두 위대한 기업이 되는 게 아니다. 사회공헌활동은 일종의 값비싼 신호인 셈이다. 역량이 없는데 섣부르게 따라 하다가는 오히려 기업의 성장역량 자체를 상실할 수도 있다. 그러나 CSR이 없으면 위대한 기업이 될 수 없다. CSR은 해당 기업이 뛰어난 역량을 지닌 위대한 기업임을 소비자들에게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브랜드커뮤니케이션 수단이기 때문이다.
안도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연구원 [email protected]
필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Colorado State University에서 커뮤니케이션 전공 석사, University of Alabama에서 커뮤니케이션 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논문 주제는 슬픔과 즐거움의 심리다. 주 연구 분야는 미디어 사용이 인지역량, 정신건강 및 설득에 미치는 영향이다. 한국경제신문 한경닷컴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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