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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고수(高手)’될 뻔한 ‘미생(未生)’ 장고 끝에 나온 최고의 묘수

주재우 | 143호 (2013년 12월 Issue 2)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최윤영(Assumption University 국제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나 하나쯤 어찌 살아도 사회는, 회사는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이 일이 지금의 나야.”(김 대리)

 

“조치훈 9단이 하신 말씀이에요. ‘바둑 한 판 이기고 지는 거, 그래봤자 세상에 아무 영향 없는 바둑. 그래도 바둑, 세상과 상관없이 그래도 나에겐 전부인 바둑.’” (장그래)

 

만화 <미생> 67()1 에 나오는 대사다. 입단을 꿈꾸며 평생 바둑만 두다가 실패해 종합상사에 낙하산 인턴으로 들어온 주인공 장그래와 직장 선배(김 대리)가 직장생활의 허무함과 자존감에 대해 나누는 대화다. 작가 윤태호는 회사 생활은 전혀 해보지 않고 평생 그림만 그린 전업 만화작가지만 이 작품을 두고꼭 내 얘기 같다라고 느끼는 젊은 직장인들이 많다.

 

지난 1120일 출판사 위즈덤하우스는 <미생> 50만 부 판매했다고 밝혔다. 한 권 정가가 11000원이니 55억 원어치가 팔린 셈이다.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조정래의 소설 <정글만리(11월 말까지 약 80만 부)>에는 못 미치지만 소설이 아닌 만화라는 장르의 한계를 뚫고 이뤄낸 성과라는 측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인터넷상에서도 이미 큰 히트를 쳤다. 책 출간에 앞서 2012 1월부터 2013 2월까지 1년여 동안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웹툰(인터넷 만화)으로 연재되기 시작해 누적 조회건수가 10억 건을 넘었다. 2012년 말오늘의 우리만화상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만화 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만화작품으로서 최고의 한 해를 누렸다. 유료 서비스로 전환된 현재도 꾸준히 독자가 들어오고 있으며 독자들로부터 역대 다음 웹툰 최고인 평균 평점 9.8점을 받았다.

 

<미생>이 만화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린 해가 2012년이었다면 2013년은 만화라는 틀에서 벗어나 원소스 멀티유즈(one-source, multi-use) 문화 콘텐츠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 해다. 우선 다음 커뮤니케이션은 광고회사 TBWA코리아와 협업해 미생 캐릭터가 등장하는 스마트폰용 단편 영화를 제작해 선보였다. 캐릭터 상품들의 출시도 이어졌다. 롯데칠성음료는 레쓰비-미생 캔커피를 내놓았다. GS리테일은 편의점 체인 GS25에서 미생 맥주컵, 종이컵, 노트, 이력서를 팔았다. 롯데백화점은 패션 브랜드 잭앤질과 함께 캐릭터 의류를 팔았다. 심지어 금융권까지 미생에 러브콜을 보냈다. 동양증권이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의 온라인 배너광고에 미생 주인공들을 넣었다. 미생 열풍은 2014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케이블채널 tvN을 운영하는 CJ E&M이 인기작응답하라 1994’의 뒤를 이을 드라마로 미생을 점찍었다. 방영은 2014년 여름부터 예정돼 있다. TV용 애니메이션 제작도 타진 중에 있다. 2014년 가을에는 다음 웹툰 서비스에서미생 시즌 2’가 연재될 예정이다. ( 1)

 

성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 만화로서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미생의 사례를 살펴보고 기업에 주는 시사점을 찾아본다.

 

 

2년 지각해 더 크게 성공

 

 

 

윤태호 작가는 허영만 작가의 문하생으로 활동을 시작해 독립한 후 <야후> <로망스> <이끼> 등의 히트작을 만들었다. <이끼>는 강우석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2010 340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윤태호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작품이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는 작가인 그에게 출판사 위즈덤하우스가 바둑과 샐러리맨을 소재로 한 만화를 그려보지 않겠냐고 섭외한 것은 <이끼>의 연재가 끝난 2009년이었다.

 

위즈덤하우스는 2008년 허영만 작가의 관상 만화 <>로 성공을 거둔 경험이 있었다. <>은 관상이라는 주제를 다뤘지만 직장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들로 채워진 만화였다. 이 출판사에서 <미생>을 담당한 최유연 팀장(편집자) “<>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유사한 기획을 준비하게 됐다실력 있는 만화가와 그에 맞는 아이템을 매치시켜 직장인들에게 실용적인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한다는 목표였다고 말했다.

 

위즈덤하우스는 내부 논의 끝에 바둑이라는 아이템을 잡았다. <이끼>로 주목을 받고 있던 윤태호 작가가 바둑에 관심이 있음을 알고 찾아갔다. 바둑 애호가인 윤 작가는 과거에 바둑꾼 이야기와 창업 이야기를 각각 만화로 그리려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이 두 가지를 합쳐보자는 출판사의 제안에 작가가 흔쾌히 응하면서 2009 4월 계약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계약서에 서명만 빨리 했을 뿐 작품은 시작될 기미가 없었다. 위즈덤하우스가 처음 제안한 제목은고수(高手)’였다. 바둑의 고수가 회사원들의 세상에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는 내용을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본인의 스타일과 맞지 않다며 찜찜해했다. 뭔가 다른 관점을 찾기 위해 수없이 한국기원을 들락거리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 때 영화 <이끼> 판권 계약을 한 렛츠필름의 김순호 대표가 힌트를 줬다. 고수가 아닌 하수, 영웅적인 경영자가 아닌 일반 샐러리맨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달라는 얘기였다.2

 

이렇게 갈피를 잡았을 때는 이미 계약하고 2년 반이 지난 후였다. “(계약 후) 1년 안에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예상보다 준비기간이 길어졌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가 오랜 시간 자료 준비와 고민을 거듭했기에 대작이 탄생할 수 있었다.” 최유연 팀장의 말이다. 윤 작가는 작품 취재를 위해 종합상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비롯, 수많은 샐러리맨과 바둑인들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대기업 종합상사들은 모두 윤 작가의 취재를 거부했기에 알음알음 지인들을 통해 취재원을 섭외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림만 그려온 윤 작가는 기업이나 무역 실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이는 평생 바둑만 둬온 고졸 인턴사원장그래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됐다.

 

윤 작가는 출판사로부터 통상적인 계약금만 받았을 뿐 별다른 간섭 없이 모든 취재를 자기 의지대로 했다. 최유연 팀장은작품 취재에 대해 위즈덤하우스가 한 일은 계약 이후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독촉하지 않고 기다린 것이라며작가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초기 기획이 무엇이었건 작품은 작가의 몫이라는 생각이 <미생>의 탄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만화의 틀이 잡히고 나자 이제 어떻게 독자들에게 선보일지 그 방법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윤태호 작가는 출판 만화 출신이다. 인터넷 만화, 웹툰이라는 장르가 생기기 전부터 책 형태의 만화를 만드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미생> 역시 웹툰이 아니라 책에 맞는 형태로 그리고자 했다.3  그러나 이미 국내 만화 시장은 스마트폰 보급과 함께 웹툰 쪽으로 급격하게 주도권이 넘어온 상태였다. 과거의 만화시장을 주름잡았던 만화 잡지들은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의 만화가들은 다음, 네이버, 네이트 등에서 무료로 웹툰을 연재한 후 이를 책으로 묶어 내는 방식을 택했다. 윤 작가와 위즈덤하우스도 이런 트렌드를 따라야만 했다.

 

“만화는 기본적으로 연재를 전제로 한다. 연재가 돼야 팬도 생기고, 그 팬들이 소장욕구로 책을 구매하기 때문이다. 웹툰으로 만화를 먼저 무료 연재하면 책이 안 팔리는 것이 아니라 웹툰으로 먼저 성공해야 책도 잘 팔린다고 볼 수 있다.” 최 팀장의 설명이다. 윤 작가는 <미생>을 출판용으로 먼저 그린 후 웹툰으로 연재하면서 그림과 대사를 하나씩 떼어서 다시 올리는 작업을 했다. 웹툰용으로 먼저 그리는 것보다 단행본의 품질이 올라가는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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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재우

    주재우[email protected]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

    필자는 공감에 기반한 디자인싱킹(Design Thinking)과 직관을 위배하는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을 활용해 고객 경험(Customer eXperience)을 설계한다. 현재 국민대 경영대학과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마케팅과 경험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에서 인문학 학사와 경영학 석사를 받았고 토론토대에서 마케팅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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