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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과 국가브랜딩

구세주 미국, 대동아공영 일본, 억척같은 중국···전쟁의 끝, 국가 브랜드를 낳다

박재항 | 157호 (2014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마케팅, 인문학

 한 대륙을 넘어서 여러 대륙의 국가들이 참여한 세계의 전쟁으로 1차 대전은 국가들의 브랜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외부에 보이는 국가의 이미지가 바뀌거나 국가적인 지향점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미국은 자칭타칭정의의 수호자내지구세주로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자기 멋대로 한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프랑스의마지노선은 전략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특유의 미학적 포장술로 인해 긍정적 이미지를 획득했다. 영국은잃어버린 영광의 대명사가 됐으며, 중국과 일본은 각각더럽고 험한 일도 마다 않는 사람들탈아시아를 꿈꾸다 엇나가 버린 2차 대전 전범국이 돼 버렸다. 이러한 국가브랜딩과 이미지 형성이 100년 후를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은 빠르게 확 변하지 않는다. 트렌드 읽기라는새로움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은연속성을 깨달을 때 제대로 성과를 낸다. 바로 역사라는 큰 호수가 우리 앞에 있다. 100년이 지난 옛날의 사건이 아닌 끊임없이 신선한 물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1차 대전은 서구 제국을 넘어 동아시아 현재에도 살아 있다.

 

많은 푸른 잎 가운데 한 송이 붉은 꽃

[萬綠叢中 紅一點(만록총중 홍일점)]

사람을 움직이는 봄빛 많은들 무엇하리

[動人春色 不須多(동인춘색 불수다)]

 

왕안석(王安石)詠石榴花(영석류화)’란 시 구절이다. 사람들의 춘심을 자아내는 것은 산을 덮은 푸른 잎들이 아닌 그 가운데 핀 한 송이 붉은 꽃일지 모른다. 브랜드가 그러하다. 기업이나 국가의 모든 것을 담고 나타낼 수는 없다. 어느 한 부분을 부각시키고 그것과 결부시켜 해석되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브랜딩은 견강부회의 행위로 치부되기도 한다. 1차 대전이라는 역사의 큰 흐름을 사소한 해프닝이나 소수 특정 인물로 일반화시킨다는 비판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원컨대 국가의 브랜드가 형성되거나 바뀌는홍일점 1차 대전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찾아보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으면 한다.

 

영국에서는 1차 세계대전을 ‘Great war’라고 부른다. 더 큰 규모의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어도 ‘Great’란 형용사는 1차 대전의 몫이었다. 엄청난 인명손실을 포함해 심대한 영향을 끼친 문자 그대로큰 난리란 의미도 있겠으나 ‘Great Britain’이란 명칭에서와 같은 향수가 느껴지는 측면도 있다. 프랑스어로 1차 대전은 ‘a première guerre mondiale’란 지극히 건조하고 객관적인 명칭으로 불리는데 ‘première’ ‘premium’으로 읽히며 역시나 향수나 자부심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2차 대전 전까지 1차 대전을유럽전쟁(European War)’이라고 했다. 유럽으로 지역을 한정함으로써 자신들의 땅 바깥과는 거리를 두고 싶었던 미국의 전통적 고립주의의 영향이 읽히는 브랜딩이다. 2차 대전으로 자신들도 세계 정세의 사슬 속에서 떨어져 있을 수 없고 적극적으로 지도적 국가의 역할을 자임하며유럽전쟁이라는 용어도 ‘1라는 보편적인 용어로 바뀌었다. 중국과 일본에서대전(大戰)’ 앞에 굳이세계(世界)’라는 단어를 덧붙인 것은 자신들의 존재까지 그 전쟁을 통해 부각시키려 한 것은 아닐까? 1차 대전은 한 대륙을 넘어서 여러 대륙의 국가들이 참여한 세계의 전쟁으로 국가들의 브랜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곧 외부에 보이는 국가의 이미지가 바뀌거나 국가적인 지향점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그런 궤적이나 편린을 브랜드적인 관점에서 짚어 봤다.

 

자칭타칭의구세주(Savior)’ 미국

“우리가 미국을 좋아하는 것은 국토가 크고 인구가 많기 때문이 아니요, 자원과 부력이 세계에서 제일 가기 때문도 아닙니다. 미국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1924년 미국 상원과 하원 의원들로 구성된극동시찰단이 베이징을 거쳐서 도쿄에 갈 때 서울에 들렀다. 이들 미국의원단의 방문이 일본의 야만적인 식민지 통치 상황을 바깥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로 여겨져 상하이 임시정부부터 시찰단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려 노력했고,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환영단과 환영 대회를 조직했다. 앞의 문구는 환영단의 대표 자격으로 월남 이상재 선생이 했던 환영사의 첫머리다. 사실 이 환영 행사는 시찰단 의원 중 딱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미국의원단에 당시 일제하의 조선 땅에 체류하는 일정이 만 하루, 예스런 표현으로 ‘1주야에 불과했다. 그나마 조선총독부에서 환영 행사를 주도하면서 미국 의원단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의전 테두리 내에 묶은 상태였다. 총독부는 미국의원단에게 조선인이 하는 환영 행사와 같은 집회에 가면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YMCA에서 혹시나 하며 미국의원단을 기다리던 800여 명의 조선 청중이 흩어질 때쯤 미국 의원 하나가 조선인들이 준비한 환영 행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독자 행동으로 그 건물에 찾아왔다. 그 의원 하나로 청중들이 다시 모이고 환영 행사가 벌어지면서 월남 선생이 위의 환영사를 한 것이었다. 이 행사마저도 40명의 경찰에 의해서 바로 해산되고 말았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일찍이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에 주재하기도 했으니 당시 조선에서 미국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의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다. 당시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재 선생이 미국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형성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젊은 시절 주미 공사관 시절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환영사에서자유로 수렴된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는 부분이 한 축이다. 또 서울 YMCA의 총무로서기독교가 다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 두 가지를 한몸에 체현한 인물이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 정치무대에 등장했으니 바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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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재항[email protected]

    - (현)하바스코리아 전략부문 대표
    -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 연구소장
    -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 본부장
    - 현대차그룹 글로벌경영연구소 미래연구실장
    - 기아차 마케팅전략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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