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대부분이 추운 겨울인 툰드라 지역에서는 나무보다 풀이 더 강하다. 작고 약할 것이라 생각되기 쉬운 풀은 사실 강인한 적응력을 갖고 있다. 한 번 태어나면 오래 사는 전략을 추구하는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짧게 사는 대신 종(種)이 번성하게 하는 전략을 개발한 덕분이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인간 사회 역시 신속하게 피드백을 받아 신제품을 짧은 주기로 출시하는 등의 ‘풀의 전략’으로 전환 중이다. 세상은 언제나 위기라는 전제로 삶을 기획하는 풀의 전략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2021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시인 김수영(1921∼1968)은 ‘풀’이라는 시로 유명하다.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권력과 민주가 엄혹하게 맞서던 시절, 이 시는 민초의 강인한 생명력을 잘 나타낸 시로 애송됐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며,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는 내용은 민초의 속성과 마음과 희망을 상징하는 데 나무람이 없었다. 더구나 세상을 떠나기 20일 전 쓴 마지막 작품이었던 데다 세상을 떠난 후에 발표됐기에 시에 나오는 바람과 풀이 누구를(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애송하던 시대의 마음을 따랐고 이런 해석은 굳어졌다. 이후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이 시를 연구한 많은 전문가와 평론가는 ‘풀과 바람=민중과 권력’이라는 해석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이를 상식화해 버렸다. 풀은 민중으로, 바람은 억압 세력으로.11최재봉, ‘‘풀’ 민중주의적 해석의 기원’, 한겨레신문 2021년 1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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