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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대포 강해지면 城은 더욱 강해졌다

임용한 | 21호 (2008년 11월 Issue 2)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실제 주인공인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년 8월 151935년 5월 19일)는 영국 옥스퍼드대 출신의 고고학도였다. 그가 처음 중동을 방문한 것은 이 지역에 남아 있는 십자군의 성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십자군이 오기 전부터 고대 중동지방은 축성술과 요새가 발달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인 이야기를 간직한 성이 오늘날 이스라엘군의 성지처럼 되어 있는 마사다이다. 해발 434m의 산인 마사다는 사면이 거의 수직의 절벽으로 되어 있고 정상부는 칼로 자른 듯이 편평하다. 정말로 신이 요새를 세우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 산과 같은 곳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로마군이 이 성을 함락시켰다는 것이다.
 
기원후 70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요구하는 열심당(Zealot) 당원과 그들의 가족 약 1000명은 이곳에서 농성했다. 로마군은 70도 경사가 넘는 비탈에다 공성로를 닦고, 이 길로 공성탑을 끌어 올렸다. 막상 공성탑이 산을 기어 올라오자 열심당원들은 아무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 성벽에서 전투를 단행하기에는 그들의 병력이 너무 적었다. 결국 1000명의 열심당원들은 집단 자살을 택한다. 그런데 이들 병력이 좀 더 충분했더라면 성이 함락을 면했을까? 그렇지 않다. 마사다의 약점은 성의 구조 자체가 지형에 너무 의지한 것이었다. 그래서 로마 공병의 기술력이 지형의 장애를 극복하자 마사다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공성구에 저항할 수 있는 성
약 1000년이 지난 뒤 이 지역에 세워진 십자군의 성은 언덕을 올라온 공성구에 저항할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성의 방어력을 보완했다.
 
십자군의 성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완전하게 남아 있는 성은 시리아에 있는 크라크 데 슈발리에이다. 이 성은 훗날 유럽에 세워진 매끈한 성들에 비하면 투박하지만 중세의 성이 갖춰야 할 모든 시설과 기능을 잘 보여 주는 교과서적인 성이다.
 
요새의 기본원리는 크게 3가지다. 첫 번째는 공격군이 공성작업을 수행하거나 공성구를 댈 수 있는 공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성벽의 굴곡과 돌출한 탑을 통해 어느 지점에서든 공격군의 측면과 등 뒤로 사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 번째, 탑과 성벽을 이중삼중으로 배치해 어느 지점을 공격하든지 공격군을 십자포화나 이중삼중의 화망 속에 갇히도록 해야 한다. 적이 어느 한 지점을 함락하거나 돌파해서 진입하면 함정에 빠진 것처럼 더욱 강력한 공격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성은 마사다처럼 생긴 언덕 위에 있다. 언덕 정상부는 편평하지만 성벽이 비탈에 바짝 붙어 있어 공간이 거의 없다. 공격군이 공성구를 대려면 로마군처럼 공성로를 닦아 접근해야 하는데 마사다와 달리 사방에 배치한 탑과 이중 성벽에서 퍼붓는 화망에 갇히게 된다.
 
이중으로 만든 성벽은 안쪽 성벽이 바깥쪽 성벽보다 높다. 이런 설계 덕에 내성과 외성의 수비병 모두가 성 바깥의 적에게 집중사격을 할 수 있다. 또 내성과 외성의 공간은 아주 좁아서 외성을 함락하고 성내로 진입하는 공격군을 두 성벽 사이의 좁은 공간에 갇히게 만들었다.
 
이 성의 능력은 실전으로도 검증되었다. 모든 십자군의 요새 중에서도 최후까지 함락되지 않고 버틴 성이기 때문이다. 1260년 마멜루크 왕조의 영웅 바이발스 왕이 공격해 왔다. 그는 외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내성까지 빼앗는 데에는 실패했다. 결국 바이발스는 성을 지키는 요한기사단에게 항복을 명령하는 문서를 위조해서 보내고, 수비대의 유럽 귀환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수비대의 항복을 끌어냈다. 수비대가 성을 양도했고, 이 성을 지키던 요한기사단의 별명이 병원기사단일 정도로 구호와 치료 활동에 전념한 덕에 이 성은 파괴를 면하고 오늘날까지 보존됐다.

당대 기술로는 함락할 수 없는 축성술
이 사건은 식량이 충분하고 성 안에 내통자가 없다면 제대로 만들어진 성을 당시 기술로는 함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유럽에서는 이 성에서 사용한 기술과 시설을 이용하고 발전시켜 강력한 요새들을 건설했다. 몽고메리 원수가 그의 저서에서 극찬한 영국의 카빌라는 1260년대에 축조한 성이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호수 속에 옮겨 놓은 듯한 구조로 성 바깥으로는 발을 디딜 땅이 아예 없다. 호수는 또 성벽처럼 정교하게 축성한 댐으로 보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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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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