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완전히 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부단 대리. ‘아직 퇴근 시간도 아니고 잠시 외부 손님을 만나러 가는데 컴퓨터는 왜 끄지?’ 옆 자리에 앉은 일만해 주임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유 대리는 얼마 전부터 점심식사를 위해 사무실을 나설 때는 물론 잠깐 커피를 마시러 자리를 비울 때나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잊지 않고 컴퓨터 전원을 끈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그러는 것이라면 마땅히 칭찬할 만하지만 사실 그 속사정은 좀 복잡하다.
지난달 초였다. 점심식사를 마친 유 대리는 자리로 돌아왔을 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창이 식사 전과 달라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저 착각이려니 생각하고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이후에도 책상 위에 놓인 소지품의 위치가 조금씩 바뀐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중 식사 후 평소보다 조금 일찍 사무실에 들어온 그의 눈에 자기 자리에 앉아있는 강 부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유 대리가 몰래 숨어서 지켜보니 강 부장은 그의 컴퓨터에서 문서를 이것저것 열어보는 것은 물론 수첩까지 뒤지는 것이었다.
유 대리의 가슴은 다듬이질하는 것처럼 콩닥콩닥 뛰었다. ‘대체, 부장님이 내 컴퓨터를 왜 보시는 거지? 그럼, 그동안 내가 없을 때마다 저렇게…?’ 그날 이후로 유 대리는 잠깐 자리를 비울 때도 컴퓨터 전원을 끄는 버릇이 생겼다. 비밀번호를 설정해 놓은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 또 다른 방향으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강 부장이 유 대리를 사사건건 호출하는 것이었다.
“이봐, 유 대리. 신제품 매출 보고서는 어떻게 됐어?”
“지금 하고 있습니다.”
“가져와 봐.”
“네? 아직 3일이나 남아서 완료를 안 했는데요.”
“그러니까 그동안 한 걸 보여 달란 말이야. 얼마나 됐는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진척 사항을 보고하라고!”
“그… 그걸, 왜?”
“나중에 엉뚱한 보고서를 갖고 오면 나만 골치 아프니까 하는 말이야. 내일부터는 하루에 한 번씩 중간보고를 하도록!”
“!”
가뜩이나 소심한 유 대리의 뒤로 들리는 강 부장 목소리가 그를 더욱 위축시켰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어야 내가 맘을 놓지. 어디서 저런 꼴통이 우리 부서에 와서 하나하나 체크를 하게 하느냔 말이야. 쳇, 뭐 대단한 게 있다고 컴퓨터는 잠가놓고 다닌담?”
자리로 돌아온 유 대리의 풀죽은 모습이 안쓰러운지 일만해 주임이 그를 휴게실로 데려갔다. 쓴 커피와 함께 쏟아내는 유 대리의 한탄을 싫은 내색 없이 들어주는 일 주임.
“에이∼ 선배, 기분 푸세요. 부장님 저러는 거 한두 번 보나요? 예전에는 매일매일 시간대별 업무 보고서를 쓰라고 했다면서요. 일일이 토를 달면서 뭐라고 하고…. 그에 비하면 지금은 양반이죠. 선배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대충 맞춰주면서 사는 게 편하죠, 뭐.”
일 주임은 유 대리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아서 덩달아 좋은 기분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후 강 부장이 일 주임을 조용히 불렀다.
“그래, 일 주임이 보기엔 내가 지금은 좀 양반이 된 것 같아? 그래도 사람 되려면 멀었다고 생각해? 회사 생활 편하게 하니까 좋아?”
‘헉! 저 말은 어떻게 들었지? 저 인간은 사람이야, 귀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