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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격파한 정지와 무명용사들

임용한 | 40호 (2009년 9월 Issue 1)
한국과 일본의 사이를 빗대어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2000년 역사를 돌이켜봐도 그 이상 적절한 표현이 없을 듯하다. 한국과 일본 주변에 몇 개의 나라가 더 있기라도 했다면 양국 관계는 좀더 다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의 동쪽은 지구의 반을 차지하는 망망대해고, 마주 보는 나라라고는 한국뿐이니 양국 관계는 편할 날이 없었다.
 
한일 관계 악연의 상징은 왜구다. 왜구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나 백제가 겨우 도시국가 형태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왜구 이야기가 등장한다. 신라의 박혁거세가 6촌의 추대를 받아 경주 분지를 지배하는 왕으로 즉위하던 때가 기원전 57년이다. 그가 즉위한 후 최초의 사건이 왜구가 서라벌로 쳐들어온 일이다. 사로 6촌의 주민들이 자유인 신분을 포기하고 자진해서 왕의 신하가 되기로 결심한 데에는 서로 단합해 왜구를 격퇴해야 한다는 이유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온 왜구는 1000년이 넘도록 해안가와 섬 주민을 괴롭혔다. 그래도 14세기까지는 왜구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왜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늘날 사소한 교통사고는 보도되지 않듯 소규모 해적들이라 역사책에 기록될 만큼 큰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규모 왜구의 침공과 신무기
1350년 수천 명의 왜구가 경남 고성군에 상륙했다. 이때부터 악몽이 시작되는데 수천, 수만 명의 왜구가 수백 척의 함대를 이끌고 고려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고려는 참담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구의 함대는 300척이 넘을 때도 있었다. 당시 고려가 보유한 전체 함선은 100척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나가서 왜구를 토벌하기는커녕 행여 예성강을 타고 개경으로 들어올까봐 개경의 포구와 강둑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다. 왜구는 태연히 개경의 턱밑인 예성강 하구나 강화도, 교동에 진을 치고 앉아 수도로 들어오는 조운선(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실은 배)을 접수했다.
 
이때부터 대략 16세기까지가 왜구의 전성기다. 그들은 고려만 유린한 게 아니라 대만을 점령해 통치하고, 중국 해안가를 초토화시키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했다. 사무라이의 상징이 된 일본도가 신무기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원래 도는 한 손으로 쓰는 무기였다. 물론 두 손으로 휘두르는 것도 있었지만, 관우의 청룡언월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대개의 양손도는 크고 무거웠다. 그런데 일본도는 중국의 양손도보다는 가볍고 날카로웠으며, 한손도보다는 길고 사람을 단숨에 동강내버릴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창은 일본도보다 길지만, 방패를 든 보병이 사용하는 창은 동선이 단조로워 일본도의 속도와 움직임을 당해내지 못했다. 창 대신 도를 들고 대항하면, 일반적인 도보다 길고 강력한 일본도는 한손도의 사정권 밖에서 방패와 사람을 단번에 동강내버렸다.
 
하지만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고려군도 꽤 강했다. 처음에는 바다보다 육지에서 고려군이 더 잘 싸웠다. 고려군이 왜구에 고전한 이유는 전투력의 열세 탓이 아니라 기동력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고려는 거란, 몽골 등 북방 민족과의 전쟁에만 매달렸기 때문에 수군 양성에 소홀했다. 갑작스레 왜구의 규모가 커지자 함대가 부족한 고려는 바다로 나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육지만 지켜야 했는데, 전 해안선을 빈틈없이 지키려면 병력을 흩어 산개시켜야 하고, 병력을 충분히 모아놓으면 빈 공간이 생겼다. 왜구는 이 약점을 이용해 고려군이 뭉치면 우회해서 빈 곳을 찌르고, 산개하면 공격해 각개격파했다. 무선도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구원 부대가 연락을 받고 출동하면 왜구는 이미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왜구의 히트앤드런 전법에 속수무책
 
이런 ‘히트앤드런’ 전법에 고려는 속수무책이었다. 주민들이 떠나버려 해안가 도시와 마을은 무인지대가 됐다. 간혹 사람들이 돌아와도 집을 짓지 못하고 주변 산속에 토굴을 파고 살았다. 바다에서 관측이 되는 지점에서는 농사도 짓지 못했고, 바닷가로 나가 고기를 잡고 조개를 주은 뒤에는 발자국과 흔적을 지우며 토굴로 돌아갔다. 자기 나라에 살면서 탈주범처럼 생활해야 했으니 그 기막힘이 어떠했을까?
 
1374년 고려의 맹장 최영은 굉장한 계획을 내놓는다. 육지에 웅크리고 앉아 왜구를 막는 데 한계가 있으니, 2000척의 병선을 건조하고 수군 10만을 양성해 바다에서 왜구를 격퇴하자는 것이었다.
 
생각은 좋았지만 시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20년은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고민에 빠졌는데,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무장이 정지(鄭地)다. 그의 방안은 한마디로 양보다 질을 추구하자는 거였다. 왜구의 장기는 일본도로 상징되는 백병전이다. 왜구가 일본도만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백병전 능력은 대단해 고려군, 중국군, 심지어 몽골군도 이들과의 백병전을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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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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