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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극한 고통 나눈 7000명, 투르크 10만軍과 맞서다

임용한 | 73호 (2011년 1월 Issue 2)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은 330년에 건국돼 천년 이상을 유지했다. 단순히 수치상으로만 따지면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된 국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처럼 큰 제국, 그것도 동서 문명의 교차로에 위치해 서유럽의 게르만족, 북유럽의 노르만족과 러시아 슬라브족, 중앙아시아에서 온 훈족, 지금의 터키와 아라비아에서 온 사라센 및 오스만 투르크 등 동서남북에서 쉴 새 없이 침공을 받았던 제국이 이처럼 오랜 생명을 유지했다는 건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천년왕국 비잔틴 멸망의 서곡
하지만 15세기가 되자 이 천년왕국에도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왔다. 1453년 4월 메메드 2세가 지휘하는 오스만 투르크 군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겹겹이 포위했다. 투르크 군의 병력은 정규군 약 10만 명에 80척 정도에 달하는 전함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러나 투르크 병영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비정규군이 포함돼 있어 병력은 훨씬 많아 보였다. 유럽측 자료에는 40만∼50만, 혹은 20만이 넘는다고 기록돼 있다.
 
전쟁 기록에서 병력은 언제나 과장이 심하다. 이 시기에 정규군 10만이면 세계적으로 드문 대단한 병력이다. 이들과 맞서는 비잔틴 제국의 육군 수비대는 겨우 7000명에 불과했다. 그 중 절반 이상이 기독교 제국을 회교도의 손에서 구하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온 의용병이었다. 의용병의 국적은 다양했지만 대다수는 제노바와 베네치아인이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도시 중에서도 해상무역과 식민지 개척에 제일 열정적인 도시였다. 덕분에 상인과 우수한 선원, 직업군인들이 많았다. 콘스탄티노플에 온 지상군 병사들은 전투 경험이 많고 명성이 높은 군인들이었다. 로도스 섬에서 온 지원병도 약간 있었는데, 그들은 과거 십자군 전쟁 때 중동지방에서 명성을 날린 성 요한 기사단원들로 십자군의 마지막 생존자들이었다.(성 요한 기사단은 아직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육군만이 아니라 해군도 필요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반도였다. 이 삼각형은 밑변이 북쪽을 향해 뒤집어진 형태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육로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들어와야 했다. 이 삼각형의 밑변은 그 유명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이 북쪽 성벽은 엄청나게 두껍고 견고해서 천년동안 그 어떤 군대도 -안에서 문을 열어준 경우를 제외하고는- 돌파하지 못했다.
 
약점이 있는 곳은 바다였다. 그 중에서도 동쪽은 망망대해가 아니고 비잔틴 반도가 건너편 육지에서 찢어져 나오면서 생긴 좁은 틈이었다. 폭은 강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바다가 뿔처럼 반도와 내륙 사이로 박혀 들어와 있다고 해서 이곳을 ‘황금뿔(Golden Horn)’이라고 불렀다. 주변 바다는 조류가 빠르고 거셌던 반면 이곳은 강이자 호수와 같은 곳이라 조류도 잔잔했다. 덕분에 이곳은 평소에는 동서양의 무역선으로 북적이는 제일 좋은 항구지대였다. 그러나 전쟁이 나면 제일 위험한 곳으로 변했다. 이쪽 해안에도 빈틈없이 성벽이 둘러져 있었지만 북쪽 성벽에 비하면 형편없이 얇고 약했다.
 
황금뿔을 지키기 위해 비잔틴인들은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이어지는 황금뿔 입구에 강력한 차단선을 구축했다. 바닷속에 쇠사슬을 가로질러 놓은 이 차단선은 교묘하게 높낮이 조절이 가능해서 평소에는 배를 통과시키고 전시에는 바다를 막았다. 쇠사슬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이 차단선 역시 콘스탄티노플의 북쪽 성벽처럼 한번도 돌파당한 적이 없었다. 예전에 이곳을 침공했던 사라센과 투르크인들은 가미가제처럼 전함을 충돌시켜 이 차단선을 끊어보려 한 적도 있었으나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비잔틴 수호에 나선 의용병
하지만 차단선이 아무리 철통같다고 해도 아무런 대비 없이 그대로 방치한다면 언젠가 적군에게 돌파를 허용하고 말 것이다. 차단선을 보호벽으로 삼아 안쪽에 전함을 배치해야 제대로 된 방어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 망해가는 제국에는 해군도 없었다. 무기창고에는 유명한 그리스 불(액체로 된 인화물질을 내뿜어서 화염공격을 가하는 화염방사무기로, 그 제조법은 지금까지도 비밀에 묻혀 있다)이 가득 쌓여 있고 선착장에는 전함 몇 척이 있었지만 그 배를 움직일 선원과 해군이 없었다.
 
그러자 무역을 위해 항구에 와 있던 제노바와 베네치아 무역선 선원들이 종군을 자원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낡은 전함을 수선하고 이들의 무역선을 개조해서 26척의 함대를 황금뿔에 띄울 수 있었다.
 
이 지원병들의 행동은 찬양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100% 순수한 것만은 아니었다. 해군에 자원한 무역선 선원들은 진정으로 비잔틴 제국을 보호하기 위해 자원한 게 아니라 상업적 이해관계 때문에, 혹은 마침 항구에 머물러 있다가 그냥 도망갈 수 없어서 마지못해 남은 것이라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학자도 있다.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도 아닌 것이 이 도시와 무역로는 막대한 이익을 주는 곳으로 그들의 부와 생계가 걸려 있었다. 게다가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그저 작은 도시국가로 한 다리 건너면 서로 다 아는 사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동포와 불쌍한 기독교인을 이교도의 손에 버리고 왔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그들의 명성에 흠이 되는 것은 물론 사업에 치명타를 입을 게 뻔했다.
 
더구나 이 자원병들은 다가올 전투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세계 최고의 요새였다. 그 안에는 아직 10만 명에 가까운 시민이 있었다.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비잔틴이 잔혹한 투르크 군에게 함락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이들의 계산이었다. (투르크 군이 기독교 군보다 잔혹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시대에는 종교를 불문하고 도시의 함락은 끔찍한 약탈과 폭력, 강간을 의미했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도시를 점령하면 병사들에게 3일의 약탈 기간을 주는 게 관례였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로마 교황은 지원을 약속했고, 실제로 지원부대를 편성 중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병력은 일종의 선발대였다. 정식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성공에 따른 명성과 보수는 이들의 용기를 상쇄할 만한 것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모험을 할 만했다.
 
4월에 공격이 시작됐다. 세계 최초로 대포까지 동원한 가공할 공격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7000명의 수비대와 26척의 함대는 한 달이 넘도록 북쪽 성벽과 황금뿔을 사수해냈고, 교황이 보낸 지원병과 보급품을 실은 소수의 함대가 투르크 함대를 격파하고 황금뿔로 진입해 들어가기까지 했다.
 
황금뿔 사수 실패
비잔틴의 성공이 확실해질 무렵, 메메드 2세가 역사에 남을 기발한 작전을 성공시켰다. 도저히 차단선을 돌파하지 못하자 전함을 언덕 위로 들어 날라서 황금뿔의 차단선 안쪽 바다에 내려놓았다. (전함을 바퀴가 달린 스케이트 보드 같은 것 위에 얹고 밧줄을 건 뒤 수천마리의 소로 끌어 당겨 언덕 위로 들어 날랐다고 한다.) 황금뿔의 제해권을 상실했지만, 이탈리아 함대는 황금뿔 안에서 해전을 벌여 투르크 군의 상륙을 저지했다. 그러나 황금뿔 바다를 상실하자 사기는 떨어지고, 상황은 절망적으로 바뀌었다. 5월 3일 12명의 선원을 태운 쾌속선 한척이 투르크 군으로 변장하고 황금뿔을 탈출했다. 베네치아에서 보내기로 한 지원부대를 찾아 위기를 호소하고 도시로 빨리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20일이 넘도록 바다를 헤맸지만 베네치아 함대는 보이지 않았다.
 
베네치아는 지원함대를 편성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콘스탄티노플로 향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서 대기했다. 베네치아가 중간에 마음을 바꿔 투르크 군을 공격하지 말고 정세를 관망하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도저히 베네치아 함대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절망한 선장은 선원들을 모아놓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한 선원이 돌아가야 소용도 없고, 도시가 함락되면 우리는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선원들이 달려들어 그를 때려 눕혔다. 더 이상 아무도 귀환에 반대하지 않았다. 5월 23일 이 배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전투에 다시 참가했다.
 
5월 28일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의 북쪽 성벽이 돌파당했다. 대포로 인한 타격이 컸고 병력이 너무 적어서 지친 병사들이 더 이상 배겨낼 수 없었다. 도시 안에서 아비규환의 살육이 벌어졌다. 용감했던 이탈리아 함대도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배들은 일렬로 서서 좁은 황금뿔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
 
이때 시민들이 선박을 향해 몰려들었다. 어떤 이들은 이미 바다에 나가 있는 배들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언제 보스포러스 해협이 투르크 군에 봉쇄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선원들은 배를 멈추고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실을 수 없을 만큼 사람을 실으면 배가 떠나고 그 뒤의 배가 작업을 이어받았다. 그 바람에 몇 척은 끝내 탈출하지 못했다. 투르크 함대가 진입했을 때 항구에 있던 배는 그때까지도 피난민을 태우고 있었다.
 
계산적 동기, 그러나 숭고한 희생
비잔틴 수비전쟁에 자원했던 선원들이 특별히 선량한 집단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선원은 해적과 구분이 가지 않는 거칠고 불안정한 사람들이었다. 참전 동기가 지고지순했던 것도 아니었다. 다분히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동기가 깔려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용기와 희생정신을 발휘했다.
 
무엇으로 이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서로의 삶과 생명에 대한 공유감이다.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 특히 격렬한 전투를 겪으며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병사들은 제대 후 사회적 지위가 크게 달라지더라도 평생토록 소식을 전하며 우정을 나누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절체절명의 순간 서로 생명의 빚을 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건 너무나 계산적이며 피상적인 해석이다. 오히려 이보다는 그들이 생사가 교차하는 그 극한의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흔히 현대 비즈니스 세계를 총성 없는 전쟁터에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그 전쟁터에 진정으로 결여된 것은 총성이 아니라 공유감이다. 서로 간 필요와 이해관계에 의해 이뤄진 연대가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삶에 대한 공유가 부족하다. 만약 기업 현장에서도 전우애에 버금가는 공유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높은 보수와 대우 등 계산적 관계만으로 얽혀지는 조직보다 훨씬 더 놀라운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공유감을 이끌어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서로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출발점이 바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성과로 이어지는 시초가 될 것이다.
 
 
임용한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 [email protected]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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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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