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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박사의 CSV 경영

김선우 | 117호 (2012년 11월 Issue 2)

 

“양질·염가의 제품생산, 이것은 기업 성취의 ABC인 동시에 기업의 사회에 대한 책임이다. 기업은 사회의 이익증진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구다.”

 

유한양행을 세운 고 유일한 박사(1895∼1971) 9세 때인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대를 졸업하고 대학 동창인 월레스 스미스와 창업을 했다. 품목은 숙주나물이었다. 신선도를 유지하면서 숙주나물을 오래 보관한 수 있는 열처리법을 개발해 장사가 잘됐다. 주문은 창업 인근 지역인 디트로이트와 시카고뿐만 아니라 펜실베이니아와 뉴욕에서도 들어왔다. ‘라초이(La Choy Co.)’라는 이름의 회사는 갈수록 번창했다.

 

30세가 되던 1925년 그는 이 회사 일로 중국과 동남아를 방문한 길에 고국에 들렀다. 21년 만에 직접 본 고국의 상황은 참담했다. 식민지 지배하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민족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한국으로의 귀국 절차를 밟았다. 유일한 박사는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던 라 초이를 스미스에게 넘기고 고국에서 새로운 기업을 창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듬해인 1926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국민의 보건 문제였다. 1920년대에 끼니를 잇지 못해 만주로 유랑하는 국민이 매년 4∼5만 명에 이르렀다. 당연히 건강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전염병이라도 돌면 걷잡을 수 없이 죽어나갔고 의약품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유일한 박사는 라초이를 동업자에게 넘기며 받은 25만 달러로 의약품을 구입해 1926 1210일 유한양행을 창립했다. 유한양행은 의약품을 주로 수입했지만 당초 국민 보건을 목적으로 설립했기 때문에 화장지, 생리대, 비누, 치약 등 각종 위생용품도 수입해 팔았다. 반드시 필요한 약품을 수입해 냉각 장치를 갖춘 창고에서 보관하다가 긴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철도를 이용해 공급하는 체계까지 갖췄다.

 

유한양행의 사업은 당시의 다른 제약업체의 행보와도 비교된다. 당시의 업계가 마약류의 진통제 판매를 통한 이윤추구에 주력한 반면 유한양행은 보건제, 피부병약, 구충제 등의 가정상비약을 판매했다. 신문광고도 제약업계에 만연한 허위 과장 광고를 하지 않고 계몽적인 광고로 일관했다. 1930 1030일자 동아일보 광고를 보면 약을 사용할 때는 신뢰할 만한 의사와 상의해 사용해야 하며 유한양행이 그러한 좋은 약을 공급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유일한 박사는 의약품 수입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경기도 부천 소사에 제약공장을 세우면서 저명한 화학자인 데이비드 발레트 박사를 초빙해 제약 기술책임자 자리를 맡겼고 이후 소사공장에서는 일본 제약회사의 의약품 품질에 못지 않은 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처럼 유한양행은 국민의 보건을 위하면서도 성장을 거듭해 1936년에는 자본금 75만 원의 주식회사로 전환할 수 있었다.

 

유일한 박사는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경영의 교과서와도 같은 인물이다. 유한양행이 본궤도에 오르자 재단을 세워 공익사업과 교육사업에 힘썼으며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CSR에 더해 그의 기업 철학에는 공유가치 창출(CSV·Creating Shared Value)의 기본 개념이 녹아 있다. CSV의 요체는 전통적인 시장과 틀에 박힌 고객 니즈만을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빈곤, 건강, 환경 등 사회적 문제 영역에서 사회적 가치 창출과 이윤 창출의 기회를 동시에 갖는 것이다. 유일한 박사는 미국에서 번창하는 사업을 접고 참담한 현실의 고국에 돌아와 당시 사회에 무엇보다도 필요했던 의약품을 팔아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면서 수익도 창출했다. 만약에 CSV 이론의 창시자인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가 유한양행이라는 기업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포터 교수의 CSV 이론이 조금 더 일찍 세상의 빛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김선우 기자 [email protected]

필자는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 인문지리학을 전공하고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2001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문화부, 경제부, 산업부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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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우

    김선우[email protected]

    경영 칼럼니스트

    필자는 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서 인문 지리학을 전공했고 워싱턴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12년 동안 동아일보와 DBR에서 기자로 일했다. 미국워싱턴주에 거주하면서 네이버 비즈니스판, IT전문 매체 아웃스탠딩 등에 미국 IT 기업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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