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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굶주림 속 밀림전투...임팔,일본군의 무덤이 되다

임용한 | 124호 (2013년 3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굶주림, 갈증, 탄약 부족, 그 어떤 것도 전투를 멈추지 못했다. 영국, 인도, 구르카 병사들과 일본군은 인간의 한계와 무지를 시험하듯 서로 극한의 전투를 벌였다. 병사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갔고 참호와 바리케이드에서는 시체가 썩어 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병사들은 싸웠고 자살공격이 속출했다.

 

기아 선상의 혈전

1944 3월부터 7월까지 버마(현재의 미얀마)와 인도 국경 지역에서 벌어진 임팔 전투는 정글과 무더위, 예년보다 일찍 시작된 장마로 최악의 환경이었다. 공격한 쪽이나 공격받는 쪽 모두 굶주려야 했던 희한한 전투였다. 영국군 수비대는 일본군에 포위돼 고립돼 있었다. 일본군은 버마의 험난한 정글과 지부산맥을 거의 도보로 넘어온 탓에 보급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특유의 정신력으로 무섭도록 공격을 계속했다. 처음 지급된 식량은 3주치 분량이었지만 4개월이 넘도록 싸웠다. 31사단장 사또 중장은 한 톨의 쌀도, 한 발의 탄약도 추가 보급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무엇을 먹고 싸웠는지 모를 일이다. 기아선상에서 탄약마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 15군 사령관 무타구치 중장은손을 잃으면 발로, 숨이 끊어지면 정신력으로 싸우라. 무기가 없다는 것이 패배의 구실이 될 수 없다는 훈시를 보냈다. 일본군 장병 중에도 그런 명령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명령에는 복종했다. 그들은 목표를 점령하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을 받으면 정말로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다.

 

영국 14군 사령관이었던 슬림 중장은 일본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일본군 500명이 지키는 곳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그중 495명을 죽이지 않고는 그곳을 뺏을 수 없다. 나머지 5명은 자결한다.”

 

임팔 전투는 소위 공세적 방어라는 개념에서 시작됐다. 1942년에 일본군은 버마를 쉽게 정복했다. 버마의 영국군과 미국군이 너무 허약했던 덕이었다. 그러나 2년간 연합군 전력이 지속적으로 강화되자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장기전으로 가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불안감에 불을 지른 게 윙게이트의 친디트 여단이었다(DBR 111도전이 창의를 낳는다, 버마 정글 뚫은침투부대친디트참조). 일본군은 침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험준한 산과 정글을 친디트가 뚫고 들어오자 방어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15군 사령관 무타구치 중장은 인도 국경을 넘어 델리까지 진격한다는 대단히 과감한 작전을 구상했다. 버마를 점령한 후 일본군은 버마 독립운동가를 내세워 명목상으로 버마를 영국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자신들을 해방군으로 포장했다. 여기에 고무돼 인도의 반영민족주의 일부 세력이 일본군으로 귀순했다. 일본군은 인도를 침공한 뒤 이들을 앞세워 인도의 반영운동을 촉발하면 승세가 있다고 봤다. 인도까지 영국에서 벗어나면 버마 전선은 궁극적으로 안정되고 연합군이 장제스(蔣介石) 정부에 지원하는 보급 루트도 완전히 단절될 것이었기 때문이다(버마의 가치는 충칭(重慶)에 있는 국민당 정부에 미국이 보급물자를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루트라는 것이었다).

 

공격에 대한 상반된 태도

인도 침공작전의 개요는 친드윈 강과 지뉴 산맥을 넘어 인도의 임팔 평원으로 진군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33사단은 남쪽에서 임팔로 밀어붙이고, 15사단은 임팔의 북쪽으로 우회해 임팔로 밀려온 영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31사단은 임팔 북쪽의 코히마를 공격해 영국군의 시선을 끌어 지원부대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게 작전의 골자였다. 일본군은 이 작전의 요체가 기습돌격에 의한 격파 전법에 있다고 봤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작전의 내용은 원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도보 이동이었다. 영국의 윙게이트가 이끄는 친디트는 정글전에 숙달된 병사들이었지만 새로운 항공지원의 도움을 단단히 받았다. 한마디로 야성과 첨단기술이 결합한 전술이었다. 반면 일본군은 제공권을 상실했다. 제공권이 있다고 해도 연합군 공군처럼 대규모 수송기와 정밀한 항공수송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차량의 이동도 힘들었지만 차량지원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군은 도보로 정글을 뚫고 맨 몸으로 모든 것을 날라야 했다. 수송에 도움을 주고 식량으로도 사용하자고 코끼리, , , 노새가 동원됐다. 길이 얼마나 험했든지 이 동물들도 수송 중에 거의가 죽었다. 게다가 이런 방식으로는 중화기나 포를 운반하기가 힘들고 무리하게 수송하면 속도가 느려지므로 중화기와 포의 양을 최소화해야 했다.

 

작전의 무리함, 특히 보급 문제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무타구치 중장은 성공을 확신했다. 그는 보급은 현지 조달을 하면 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지와 정신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작전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한 예비 계획을 짜는 것도 거부했다. 그런 계획을 준비하면 필승의 신념에 모순되고 결과적으로 사기와 작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였다. 또한 무타구치는 고집이 세고 화를 잘 내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참모 중 아무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못했다. 일본의 최고 실권자이자 다이혼에이(大本營)의 도조 히데키도 성공 가능성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작전을 허가했다. 그들은 일본이 인도를 해방시킨다는 정치적 명분에 경도돼 작전을 냉정하게 평가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임팔에 주둔 중인 영국군 14군 사령관 슬림 중장도 공격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슬림은 무타구치와는 정반대로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고 정도를 벗어난 무리한 공격, 부하들에 대한 가혹한 혹사에 반대하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영국의 수상 처칠과 매스컴에서 극찬을 받은 윙게이트식 특공 공격에도 반대했다. 병사들의 희생이 크고 실질적 성과는 적다는 이유였다. 이런 점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정석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슬림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소신이 확고했다. 일본군의 공격을 탐지한 슬림은 무모하게 공격하기보다 일본군을 끌어들이자는 작전을 세운다. 일본군이 공격해 오면 맞서지 말고 후퇴해서 임팔로 집결한다. 그건 일본군이 바라는 바지만 영국군도 바라는 바이다. 영국은 임팔에 병력을 집결해서 승부를 건다. 슬림의 승부수는 임팔로 후퇴하면 영국군은 보급이 쉬워지고 일본군은 보급선이 과도하게 길고 험해진다는 것이었다. 정치가들은 이 작전에 불만이었다. 일본군의 인도 국경 돌파는 인도 정국을 불안하게 할 수도 있고 병사들의 사기도 저하시킬 것이다. 그러나 슬림은 군사작전이 정치적 명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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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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