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디자인 전략
편집자주
‘디자인’이라는 말을 듣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라고 떠올린다면 수주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안서 디자인은 단순히 문서를 잘 꾸미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안 입찰 분야의 글로벌 컨설팅사 쉬플리 한국지사(www.shipleywins.co.kr)가 제안 디자인 전략을 연재합니다.
지난 연재를 통해 ‘제안은 단순한 정보가 아닌 메시지로 전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제는 ‘메시지는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를 알아볼 차례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스토리(Story)다. 스토리는 프레젠테이션을 비롯한 많은 커뮤니케이션의 단골 주제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렇게 익숙한 개념인 스토리를 막상 제안사업에는 잘 접목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제안사업에서 스토리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며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해 두 번에 나누어 정리하려 한다. 먼저 스토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위해 ‘스토리가 효과적인 이유’ ‘제안에서 스토리를 적용하는 방법’ ‘스토리 작업 시 주의할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1. Story가 효과적인 이유: Fact vs. Story
왜 사실(Fact) 그대로가 아닌 스토리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지 사실과 스토리를 비교해서 보면 명확해진다.
① Fact는 좌뇌의 기능으로 Story는 우뇌의 기능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논리적 사고를 통해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감성적으로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는 판단의 과정에서 논리적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판단을 마친 후에 판단을 합리화하기 위해 논리를 사용한다는 얘기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논리적으로 판단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나 갖고 싶은 상품을 선택하는 패턴만 돌아보더라도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판단 이전에 이미 결정을 완료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림 1)
감성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감성적 기능을 하는 우뇌가 판단에 더 많이 사용된다는 의미다. 이 말은 좌뇌의 기능을 써서 인식하는 Fact(사실)보다 우뇌의 기능을 써서 받아들이는 Story(스토리)가 판단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따라서 평가자의 판단에 따라 수주 여부가 결정되는 제안에서 평가자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사실보다 스토리로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② Fact는 기억하지 못하고 Story는 기억한다.
가짓수가 많은 식재료 쇼핑리스트를 메모 없이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쇼핑리스트의 식재료를 이용해 실제 만들고자 하는 음식의 조리 과정을 생각하면 리스트를 기억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 된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 역시 일종의 스토리다. 이처럼 사실의 나열로 기억하기 어려운 내용들은 스토리를 통해 더 쉽게 기억할 수 있다. (그림 2)
얇은 부분 0.4㎝, 두꺼운 부분 1.94㎝, 무게 1.36㎏이라는 사실들의 나열보다 ‘서류봉투에 들어갈 만큼 얇고 가벼운 노트북’이라는 스토리를 입혔을 때 청중들은 오래도록 이 노트북의 특징을 기억하게 된다. 물론 청중이 정확한 수치는 외우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달하려고 했던 핵심메시지는 각인됐기 때문이다.
2개 이상, 많게는 10개 이상의 기업 간 경쟁이 이뤄지는 제안 환경에서 비슷한 솔루션을 제시하는 수많은 제안들을 모두 접하고 나면 평가자들은 사실 기업별 제안내용을 기억조차 하기 어렵다. 또한 정보의 나열과 논리만으로는 비전문가, 또는 부분 전문가인 평가자에게 기술적으로 어렵거나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을 기억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평가자의 기억에 남기고 싶은 핵심 메시지는 스토리를 사용해야 한다. 사실 자체만으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스토리를 통해 각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③ Fact는 인식되고 Story는 공감된다.
자신을 소통전문가라고 소개하는 강사가 있다. 여기서 그친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이 사람의 하는 일을 짐작하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청각장애 아버지와 소통이 어려웠던 경험을 계기로 소통전문가가 된 과정을 하나의 스토리로 들려주면 청중들로부터 얻는 공감도 커지고 더 영향력 있는 강의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림 3)
<그림 3>의 하단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한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꿈이 이뤄졌을 때의 스토리를 상상하고 말했다. 고매하지만 단지 한 사람의 꿈으로 그칠 수 있는 내용이 스토리를 통한 공감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꿈이 돼 결국은 성취에 이르렀고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스피치의 하나로 남게 됐다.
이처럼 단순한 사실 전달보다는 스토리를 통해 청중과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단지 사실을 알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가자들의 공감을 통해 수주를 이끌어내야 하는 제안에서 핵심 메시지를 스토리로 개발해 설득하면 평가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다.
④ Fact tells, but story sells.
‘Fact tells, but story sells’라는 말이 있다. Fact(사실)는 전달되지만 Story(스토리)는 팔린다. 즉 스토리는 지불의 가치를 만든다는 의미다. 이는 사실과 스토리 그 자체가 아닌 인류역사의 관점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대니얼 핑크는 그의 저서 <새로운 미래가 온다>에서 역사의 흐름에 따른 이러한 가치의 변화를 잘 설명하고 있다. 먼저, 사실에 대한 접근이 누구에게나 즉각적으로 광범위해졌다는 점이 사실(fact) 자체의 가치를 급속히 떨어뜨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좌뇌를 통한 풍요가 필요하던 시대에서 우뇌를 통한 감수성을 요구하는 시대로 변화했음을 역설했다. 우뇌의 감수성을 통한 스토리가 더 가치를 갖는 이유다. (그림 4)
제안사업은 결국 수주라는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자사의 상품과 솔루션을 파는 것이다. 고객은 더 가치 있는 제안을 선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안하는 상품과 솔루션을 사실 나열 그대로 전달하기보다 스토리를 입힐 때 더 높은 가치가 돼 고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2. 제안에서 Story 적용 방법: Story = Idea + Flow
지금까지 말한 스토리의 효과에 대해 잘 알더라도 막상 스토리를 제안에서 실제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제안은 다량의 구체적인 설명과 계획이 포함되기 때문에 광고나 홍보 수준으로 스토리 위주의 전개가 가능한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부분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오프닝, 클로징이나 주요 페이지에 아이디어를 넣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이 아이디어가 flow(잘 짜인 흐름 혹은 맥락)로 연결된다면 스토리가 될 수 있다.
Flow라고 해서 소설처럼 아이디어에 줄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flow란 ‘맥락’이라는 의미로 보면 된다. 전체의 맥락을 고려한 아이디어가 스토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스토리에 대한 관점을 조금 확장하면 스토리는 이미 제안 사업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깨닫고 나면 실제 스토리 적용에 대한 부담감이 한결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아이디어가 부분에 국한된다면 스토리는 전체와 연관돼 있다. 아이디어가 순간적이라면 스토리는 연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이디어는 한 번의 자극으로 끝나지만 스토리는 그 자극을 통해 청중을 더 몰입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달(moon)에 대한 아이디어가 달(month)이라는 맥락(flow)을 통해 스토리가 되는 것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림 5)
몇 가지 예를 통해 맥락이 있는 아이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스토리를 보면 제안에서 스토리의 적용 범위와 방법이 매우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6>은 전산시스템 구축 사업에서 경쟁사에 비해 경영정보시스템이 강한 제안사의 장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슬라이드이다. 파이차트의 전체 부분 중 핑크컬러에 해당하는 경영정보시스템이 일정 비율 이상 채워지지 않을 경우 전체 시스템이 잘 굴러갈 수 없다는 것을 표현했다. 파이차트는 시스템 구축을 통해 이루려는 ‘농수산물의 원활한 유통’을 상징하는 수레바퀴로 변한다. 그리고 잘 굴러가는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줌으로써 원활한 유통과 그렇지 않은 경우를 비교해서 평가자를 설득하고 있다.
파이차트가 수레바퀴로 변하는 아이디어가 스토리가 되도록 만드는 맥락은 무엇일까? 바로 고객사의 캐릭터인 배추와 생선이다. 설명 위주의 슬라이드 구성이지만 강조 부분만 되면 이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자칫 기술설명 위주의 지루할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에서 집중을 놓칠 수 있는 청중도 최소한 이 캐릭터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집중을 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림 7>은 제안의 콘셉트를 표현한 한 장의 슬라이드다. 국가의 운송을 담당하는 고객사의 로고형태를 레일로 스케치한 아이디어다. (실제 슬라이드에서는 먼저 로고가 레일로 변하고, 이 위에 지하철이 나오고,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이 순차적인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됐다.) 한 장의 슬라이드지만 제안의 전체를 포괄한다는 맥락에서 이 역시 스토리로 볼 수 있다.
<그림 8>은 장의 시작(간지)마다 제안사의 의지를 담은 문구와 이미지를 넣은 슬라이드, 핵심 페이지에서는 손 스케치로 표현한 슬라이드, 주요 프로세스를 이모티콘과 화살표의 변화를 통해 설명하는 슬라이드다.
내용이 담겨야만 스토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위 사례와 같이 시각적 효과만으로도 맥락(flow)이 있으면 스토리가 될 수 있고 이 역시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스토리의 효과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3. Story 작업 시 주의점: 명확한 Message, 그 다음 Idea
스토리를 위한 아이디어 발상에서 자주 발견하는 잘못된 모습이 있어 이에 대한 주의를 당부하며 본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디어를 고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비유그림인 <그림 9>에서 ‘술’이라는 명확한 메시지에서 출발한다면 이를 전달하기에 적합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범위 역시 명확하게 한정되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양질의 아이디어가 나올 확률이 더 높아진다.
그러나 대상을 대충 분석한 불명확한 메시지에서 아이디어 발상을 시작했을 때에는 여러 문제들이 발생한다. 발상과정에서도 적합하지 않은 아이디어들이 산발적이고 광범위하게 나온다. 그리고 선별과정에서는 ‘메시지 전달의 관점’이 아닌 ‘창의성의 관점’에서 아이디어를 선택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메시지 자체가 명확하지 않은 관계로 그 메시지가 명확한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어느 신선한 아이디어가 나오면 단지 신선함을 이유로 좋은 아이디어라는 순간적인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목적과 수단이라는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이다.
<그림 9>의 오른쪽을 보면 ‘마실 것’이라는 불명확한 메시지에서 출발해서 산발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게 됐고 그중에 창의적 아이디어로 보이는 오렌지 패키지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전달받을 대상은 ‘취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비유로 설명했지만 이처럼 아이디어에 집중하느라 메시지 전달이라는 목적을 놓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런 경우는 오히려 스토리가 없는 메시지가 더 낫다.
지금까지 다룬 ‘제안에서 스토리 이해하기’에 이어서 실제 스토리를 만드는 과정과 그 결과물들을 다음 글에서 보여줄 예정이다.
김효기 쉬플리코리아 디자인센터 팀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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