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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에서 배우는 경영

동물의 왕국엔 핏줄이 중요하지만…‘+능력 검증’은 사회 발전의 필수조건

서광원 | 171호 (2015년 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전략

 미국의 명문 시카고대에서 붉은털원숭이를 통한 영장류 및 인간행동을 연구하는 다리오 마에스트리피에리 교수는 능력 대신을 중시하는 이탈리아를 탈출해 미국에서 기회를 잡은 이탈리아 지식인 중 하나다. 그는 붉은털원숭이 사회가 이탈리아 사회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자기 핏줄만 챙기는 혈연 중시 성향 탓에 서열에 따른 계급이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다. 이런 문화는 실제로 사회적 불행을 낳고 있다. 명품 기업이 즐비한 이탈리아에서 정작 세계적 규모의 글로벌 기업을 찾아보긴 어려워졌다.

 

구찌, 아르마니, 베르사체, 페라가모의 공통점이 뭘까?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이다. 그러면 볼리올리, 페이, 드리스 반 노튼에도 공통점이 있을까? 이제 막 인지도가 올라가고 있는 명품들이다. ‘가가밀라노’(시계), ‘투움’(주얼리), ‘파스콸레’(신발), ‘프렌체티크’(모피)처럼 낯설기 만한 브랜드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모든 명품 브랜드를 아우르는 공통점이 있다. 이탈리아산()이라는 점이다. 아마 우리가 모르는 명품들도 많을 것이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이처럼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즐비한 이탈리아에 세계적인 대기업이라고 할 만한 업체는 사실상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자동차로 유명한 피아트가 주인공이다. 왜 명품 브랜드 숫자는 이처럼 많은 국가에 세계적인 기업은 전무하다시피 한 것일까.

 

전화로 이뤄지는 은밀한 민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95년까지 이탈리아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군 복무를 해야 했다. 대학에 다니느라 4년 동안 입대를 연기했던 다리오도 마찬가지였다. 입대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자 그는 황금 같은 12개월을 악몽 같은 군대에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이탈리아 군대는 미국 군대처럼 높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이스라엘 군대처럼 신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시간 낭비에만 그치면 다행이고 온갖 스트레스와 가혹 행위를 당할 수도 있었다. 특히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서쪽으로 배치되는 건 최악의 상황이라 할 만했다. 험한 산악지형인데다 고립된 지역이어서 고참들로부터 별의별 가혹 행위를 당할 수 있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던 다리오는 어떻게든 공군으로 빠지고 싶었다. 공군기지는 대도시 주변에 있는데다 군사훈련도 거의 없었다. 회사원처럼 아침에 출근해 오후 5시면 퇴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군인들의 부대배치는 로또 추첨과 비슷한 원리로 시행됐다. 공정한 배치를 위해 국방부가 지정한비밀 공간에서 컴퓨터로 무작위로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하늘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좋은 방법이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에게는추천이라는 사회적 관습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미국에서 흔히 이용되는 추천(recommendation)과 같은 뜻을 가진 단어(raccomandazione·라코만다치오네). 추천받은 당사자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도 같다. 하지만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국의 추천이 주로 문서(종이)로 이뤄지고 은사나 상사처럼 함께 일해 본 사람이 당사자의 자질에 대한 평가를 하는 데 비해 이탈리아에서의 추천은 주로 말로, 그것도 전화로 이뤄졌다.

 

당사자의 자질보다 민원을 접수한 사람, 그러니까 전화를 거는 사람의 영향력이 중요하다. 미국에서의 추천이이 사람은 쓸 만하다는 권유 또는 지지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 이탈리아에서의 추천은 강력한 요청이나 명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리오의 주변에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힘깨나 쓰는 유력 인사와 연줄이 전혀 없는 고등학교 수학교사였다. 다행히 제자 중 한 사람이 자기 아버지에게 신세를 진 장군이 하나 있다며 다리를 놔줬다. 다리오는 이 실낱같은 연줄을 동원한 덕분에 공군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워낙 추천이 많다 보니 배치된 100명 중 10명은신의 보직을 떠나 일반 부대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모두 부대 내 공중전화로 달려가 부모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는 일이 벌어졌고 결국 그 장군이 담당 대위에게 두 번이나 전화를 한 끝에 다리오 역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당시 부사관이 작성한 100명의 명단 중 제일 위쪽에 적힌 병사의 아버지는 은행장이었고, 또 다른 병사의 아버지는 정육점 주인이었다. 또 다른 병사의 아버지는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은행장은 부사관의 아들을 취직시켜줬고, 정육점 주인은 늘 신선한 고기를 제공했으며, 약국 주인은 비싼 약을 가져다줬다. 연줄이 없거나 약한 10명은 규정에 따라 육군 기지로 전출돼 지옥 같은 군대생활을 해야 했다.

 

군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괜찮은 대학의 박사 과정에 입학하려면 돈이 많거나 연줄이 좋은 부모를 만나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박사과정(로마대학 심리학)을 마친 다리오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지도교수 밑에서 자리가 날 때까지충성을 바쳐야 했고, 어떤 식으로든 관계의 강도를 높여야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이탈리아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어떤 식이란 대개 돈이었다. 물론 영향력 있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굵은 동아줄 그 이상이었다. 아들을 직접 심사해 교수로 채용하고 자신의 학장직까지 물려줬다가 뉴스의 인물이 된 사람도 있을 정도였고, 어떤 대학의 경제학과에는 같은 성씨가 무려 8명이나 있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추천후원은 이렇게 가족과 친척과 아는 사람을구원하는 막강한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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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광원[email protected]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필자는 경향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경영 전문 기자로 활동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대한민국 리더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비롯해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사자도 굶어 죽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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