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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무적의 스파르타, 변화 거부해 망하다

임용한 | 13호 (2008년 7월 Issue 2)
스팍테리아 섬의 전운
기원전 425년 어느 날 이른 아침,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지방의 작은 섬 스팍테리아(현재의 나바리노 만 입구 스파기아 섬). 당시 이곳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스팍테리아 섬은 만의 입구에 방파제처럼 가로 놓인 작은 무인도였다. 모양도 꼭 방파제처럼 가늘고 길쭉하게 생긴 이 섬은 긴 곳의 길이가 24km, 폭은 1km도 되지 않았다. 

이날 섬의 양 끝으로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군이 상륙했다. 지휘관은 그리스 최고 웅변가이자 전략가인 데모스테네스. 병력은 중장보병 800명, 궁수와 경보병 800명이었다. 섬의 중앙에 위치한 적군 병력은 중장보병 40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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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넘는 압도적인 병력이었지만 섬의 중앙부로 행군 중인 병사들의 마음은 결코 밝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대는 그리스 최강의 군대로, 이날까지 불패의 전설을 자랑하는 스파르타의 정예보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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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전인 기원전 480년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300명의 스파르타 중장보병은 100만의 페르시아군(실제는 16만 명 정도였다)을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사흘이나 저지했다. 그리스 측의 한 반역자가 페르시아군에 그곳을 우회하는 샛길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스파르타군은 더욱 성공적인 방어전을 수행했을 것이다. 사실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스파르타군 단독이 아니라 그리스 연합군 7000명과 함께 치른 전투였다. 페르시아군이 샛길로 우회해서 그리스군을 포위하자 명예와 자부심을 아는 스파르타군은 자진해서 그 자리에 남아 탈출하는 그리스군을 엄호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군은 전멸했지만, 이 전투는 스파르타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가 됐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가서 스파르타 사람에게 말해 다오. 우리는 국가의 명령에 복종해 여기에 누워 있노라고.” 공격군의 병사들은 속으로 이 유명한 비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청동 보병대 격파의 비법
그러나 이런 전설적인 스파르타군 앞에서도 지휘관 데모스테네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에게는 이 전설의 청동보병대를 격파할 비책이 있었다. 방법은 알고 보면 간단했다. 40kg에 이르는 무거운 청동 갑옷 대신에 투창과 돌멩이로 무장한 경보병대를 투입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중무장한 보병이라도 화살과 투창·돌멩이의 공격을 무한정 막아낼 수는 없었다. 경보병들이 야만인처럼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집어던지며 스파르타군 주변을 맴돌았음에도 느린 중장보병들은 경보병의 이런 공격에 대처할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마침내 스파르타군이 갑옷을 벗고 투항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써 항복보다 죽음을 택했던 스파르타의 역사에는 종지부가 찍혔다. 100만 페르시아군에도 굴복하지 않은 스파르타군이 중장보병도 아닌 하급시민이나 농노로 편성된 경보병대에 항복한 것이다. 

데모스테네스는 어디서 이 비법을 찾아냈을까? 역사가들은 1년 전 사건을 지목한다. 데모스테네스는 2000명의 군단을 이끌고 아이톨리아 정벌에 나섰다. 아테네와 동맹군은 특별히 선발한 최정예 부대이고, 아이톨리아인은 중장보병도 없는 야만족이었다. 그러나 이 야만족의 투창 공격에 아테네군은 철저히 유린돼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패배로부터 교훈을 얻은 데모스테네스는 이때 얻은 교훈을 스팍테리아에서 그대로 적용했고, 스파르타군의 ‘불패 전설’을 종식시켰다. 

그렇다면 그리스 폴리스의 지도자들은 중장보병의 문제점을 몰랐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중장보병으로 페르시아 전쟁에 종군했던 소크라테스 같은 현자가 중장보병이 경보병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페르시아 내전에 종군한 크세노폰의 회고록 ‘아나바시스(소아시아 원정기)’만 봐도 그들은 중장보병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며, 기병과 경보병 엄호 없이 중장보병 단독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 폴리스들이 오랜 세월동안 중장보병 중심의 스포츠 같은 전투 방식을 고수한 이유는 중장보병의 약점을 몰라서가 아니다. 중장보병은 값비싼 전투 장비를 자력으로 장만해야 했기 때문에 부유한 중산시민층(이들은 오늘날의 시민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도시에 거주하는 지주층이었다)만이 중장보병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즉 사회의 신분관계가 군사제도에도 그대로 반영됐으며, 반대로 전쟁에서의 역할이 사회에서의 지도적 위치와 권리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됐다. 이들은 자신의 권위와 품위를 유지하는 전투 방식을 개발해 냈다. 바로 중장보병끼리 스크럼을 짜고 싸우는 방식이었다. 

전투는 평탄한 곳을 골라서 진행됐다. 전투장으로 가는 동안 체력을 비축해야 했으므로 시민은 비무장으로 마차를 타고 가고, 갑옷과 장비는 하인들이 메고 갔다. 고귀한 사람들이 하인과 농노들이 보는 앞에서 추악하게 싸울 수가 없기 때문에 싸우기 전에 머리를 빗고, 이도 잡고, 몸단장도 하고 나갔다.
 
중장 보병대는 신분제의 산물
전투도 대단히 신사적이었다. 중무장한 스크럼끼리 부딪치므로 상대를 무찌르기는 쉽지 않았다. 소수의 희생자가 나고 상대의 진에 균열이 생기면 전투는 바로 끝났다. 상대가 등을 보이며 도주해도 추격해서 살육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었지만 스크럼을 짜고 전력으로 부딪치므로 추격할 기운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리스에서 중장보병 전술이 발달했다는 사실 자체는 아이러니다. 그리스는 산이 많고 평야가 드문 곳이어서 전술적 상식으로 보면 처음부터 중장보병보다 경보병이 훨씬 적합하고 쓸모가 많다. 그럼에도 그리스 시민들이 자신들의 병종으로 중장보병을 선택한 이유는 신분제적 개념으로 보면 보편성과 상식보다 ‘희소성’이 상위계급에게는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중장보병제의 배후에 있는 이 같은 사회적 이유를 이해한다면 하층 신분인 경보병을 동원해서 중장보병대를 유린하거나 도망가는 중장보병을 추격해 때려잡는 것은 그야말로 몰상식하고 흉악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은 짧고 일상은 길다. 그리스 시민들이 한 번의 승리와 작은 보상금을 위해 사회의 신분관계와 특권을 포기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데모스테네스는 왜 중산시민층 간의 암묵적 합의를 깨고 경보병을 동원해 중장보병을 공격한 것일까. 세상이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산시민층의 특권은 수많은 폴리스가 독립국가로 존재하는 사회에서나 가능했다. 정복전쟁이 시작돼 페르시아나 중국 같은 통일왕국이 성립한다면 시민층의 특권은 당연히 사라진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시민층의 특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폴리스가 정복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모스테네스가 승리했음에도 그리스인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자 어려움이기 때문이었다. 스팍테리아에서 스파르타군의 전설을 끝장낸 데모스테네스도 자신이 격파한 것은 스파르타군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세계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아니 깨닫지 못했다기보다 차마 그것을 선언하고 시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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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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