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정도면 팬데믹 이전으로 일상을 돌릴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기대는 새로운 변이의 출연으로 다시 힘을 잃고 있는 모습입니다. 완전한 사무실 복귀에 대한 명분이 힘을 잃는 사이, 감염병 상황과 상관없이 팬데믹 이전의 근무 형태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저항도 만만치 않습니다.
애플의 머신러닝 담당 이사 이안 굿펠로(35)가 대표 사례로 대서특필된 바 있습니다. 그는 애플의 팀 쿡 CEO가 주 3일 출근제를 도입하며 사무실 출근 일수를 늘린 데 대해 “나는 내 팀이 더 유연하게 일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며 가차 없이 사표를 냈습니다. 원격 근무에 대한 장점도 몇 차례 피력해 왔던 쿡 CEO는 “하지만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라는 일터의 핵심적 가치를 놓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설명했지만 직원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쿡 혼자만 ‘꼰대’는 아닙니다. 혁신적인 문화를 자랑하는 실리콘밸리의 경영자들 사이에서도 쿡의 주장에 동조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MS)가 31개국 3만1000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2022 워크 트렌드 인덱스’에 따르면 원격 근무의 생산성을 두고 경영진의 54%는 ‘악영향을 미쳤다’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일반 직원의 80%가 ‘이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높아졌다’고 답한 것과 비교해 큰 온도차를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연구 주체였던 MS조차 원격 근무를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근무 형태로의 전환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일에 대한 가치관이 기존 세대와 크게 다른 MZ세대에게 사무실 복귀를 종용하다 인재를 놓치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링크트인의 라이언 로슬란스키 CEO는 팬데믹을 계기로 많은 직장인이 자신의 삶의 가치와 방식에 부합하는 기업 문화를 찾아 직장을 옮기는 ‘대개편(Great Reshuffle)’의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고 말합니다. MS의 사티아 나델라 CEO 역시 ‘새로운 일의 세계’를 주제로 HBR(하버드비즈니스리뷰)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하이브리드 근무와 대개편이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을 근본적, 구조적으로 바꾸고 있는 메가 트렌드”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하이브리드 근무의 일환으로 최근 많은 기업이 관심을 갖고 추진하는 제도가 ‘워케이션(Work+Vacation)’입니다. 말 그대로 일과 휴가를 병행할 수 있게 한 워케이션은 ‘디지털 노마드(디지털 유목민)’ 인구를 더욱 확대시킬 전망입니다. 디지털 노마드란 인터넷으로만 연결될 수 있으면 어디서든 일하면서 여행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미국의 컨설팅 기업인 이머전트리서치와 비즈니스 전문 플랫폼 MBO파트너스의 공동 조사 결과, 스스로를 디지털 노마드라 부르는 미국인의 수는 2019년 730만 명에서 팬데믹 이후인 2020년 1090만 명으로 49%나 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국내에서도 발 빠르게 워케이션을 도입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엔 근로자에겐 일과 삶의 균형을, 기업에는 창의적 성과를, 지역사회에는 경제적 효과를 창출할 것이란 기대감이 작용합니다.
이렇게 사회적 분위기와 제도 자체는 조성되고 있지만 아직 보완돼야 할 점도 많아 보입니다. 워케이션 참여 혜택이 주로 저연차 젊은 직원에게 집중되는 탓에 사무실을 떠나려면 눈치가 보이는 중간관리자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 그중 하나입니다. 또한 공간뿐만이 아닌 업무 시간 역시 직원들의 선택에 맡기는 하이브리드 근무의 본질을 기억해야 회사와 직원이 모두 만족하는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즉, ‘공간의 분리’만 이뤄졌던 재택근무 상황과 달리 시차가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될 수도 있는 워케이션 활용 시 비동기(asynchronous)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시간의 분리’ 기술도 익혀야 합니다.
‘2022 워크 트렌드 인덱스’ 연구를 총괄한 MS의 자레드 스파타로 부사장은 “팬데믹을 2년여 이상 겪으면서 사람들은 회사나 일을 위해 삶의 다른 소중한 부분들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훨씬 더 강해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른바 ‘소중한 나 방정식(worth-it-equation)’에 대입해 일의 비중과 방식이 내 삶의 가치와 부합하는지 좀 더 면밀히 살피게 됐다는 것입니다.
한번 바뀐 삶의 태도나 가치관은 원점으로 돌아오기 힘듭니다. 따라서 팬데믹이 재촉한 ‘일의 유연성’은 앞으로도 어떤 방식으로든 기업이 계속 고민해야 할 화두가 될 전망입니다. 구성원 모두가 ‘소중한 나’를 지키며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일터의 미래를 상상해보면서 건강하고 시원한 여름 나시길 바랍니다.
김현진 편집장•경영학박사[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