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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묻고 신하가 답하다: 철종과 김윤식

“백성은 적게 가진 것보다 불균등을 걱정”

김준태 | 358호 (2022년 1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19세기 조선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자 철종은 대책을 묻는다. 조선 말기 학자이자 정치가인 김윤식은 철종과 조정 대신들이 본질 해결 대신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완화하려 든다고 비판한다. 자신들의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과감한 조세 개혁을 저지하려 드는 조정의 태도를 지적한 것이다. 리더가 전사적인 개혁을 주문했지만 임원진이 기존 방식을 고수하고 상황 탓만 하며 문제 극복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개혁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1862년(철종 13년) 한 해 동안, 경남 진주를 중심으로 경상도 19개 고을, 전라도 38개 고을, 충청도 11개 고을(그 외 지역은 3곳)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조정의 무능과 사회 모순의 심화로 고통받던 백성들이 참다못해 궐기한 것이다. 이때 가장 큰 이슈가 전정(田政, 토지 조세 수취 행정), 군정(軍政, 군역 행정),1 환정(還政, 환곡 행정)2 세 가지여서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조정의 움직임도 긴박했다. 전국에 걸쳐 백성이 동시다발로 봉기한 것은 조선왕조가 창업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놀란 조정은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을 설치해 이 문제를 바로잡을 방법을 논의했고 6월에는 전국의 벼슬아치와 유생을 대상으로 대책(對策)을 묻는 특별 시험을 시행했다. 이번 화에서 살펴볼 김윤식(金允植, 1835∼1922)3 의 시권(試券, 답안지)은 이때 작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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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윤식의 대책은 철종의 책문을 비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책문이 내려오자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하인이나 아녀자들조차도 형식적인 겉치레라고 지적하지 않는 이가 없고, 식자(識者)들은 도리어 이 때문에 백성의 신뢰를 상실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배고파 우는 아이를 달래놓고 먹을 것을 주지 않아 속을 더욱 치밀어 오르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했다.

김윤식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당시 철종과 조정 대신들이 본질을 해결하려 들지 않고 말단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4 병의 뿌리를 뽑는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병증만 완화하려 든다는 것이다. 김윤식이 보기에 문제해결의 핵심은 ‘전정(田政)’에 있었다. 백성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려면 최소한의 소득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재산세이자 소득세에 해당하는 전세(田稅)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더욱이 조선 후기에 대동법(大同法)이 도입되면서 공납(貢納)5 이 전세화하는 등 전세의 비중이 더욱 높아졌다. 만약 전세가 투명하지 못하고 과중하게 부과되거나 혹은 중간에 누가 착복이라도 하게 되면 백성이 곧바로 고통받는 구조다. 바로 철종 대의 상황이 그러했는데 심지어 은루결(隱漏結)6
이 늘어나면서 그에 따른 결손분을 백성에게 떠넘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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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태[email protected]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김준태 교수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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