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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성, 얼음성… 기발한 宋장군 아이디어

임용한 | 46호 (2009년 12월 Issue 1)
18세기 영조대에 송규빈(宋奎斌)이라는 무관이 살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을 역임한 장수 집안이었다.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형제들은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송규빈도 평생토록 무장으로 살았는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모아 83세이던 1778년(정조 2년)에 <풍천유향(風泉遺響)>이라는 병서를 편찬했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군사 전략가를 보면 무관으로 근무한 적이 없는 이론가도 있고, 고위 장성이나 군사 행정가도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병사들과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온 중하급 장교들은 저서를 지은 예가 매우 드문데, <풍천유향>이 바로 그런 사례다.
 
 

 
송규빈은 30여 년간 전국의 군사 요충지에서 군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특히 토목 공사나 진지 구축 공사에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영조 때 시행한 청계천 준설 공사는 최근의 청계천 복원 공사보다 더 크고 힘들었던 국책 사업이었다. 송규빈은 이 사업과 관련한 아이디어를 냈는데, 이로서 영조는 그를 유능한 토목 공사의 전문가로 기억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근무지마다 지형을 살피고, 거기서 벌어진 전사를 되새기고, 전술과 무기를 검토한 뒤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고대부터 북방 민족이 우리나라를 침공할 때 반드시 거치는 2가지 길이 있었다. 의주 앞에서 압록강을 건너 선천-곽산-안주로 내려오는 길과 약간 내륙으로 들어가 귀주-운산-태천으로 돌아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그랬고, 거란족, 몽고족, 청나라 군대도 모두 이 길을 이용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골짜기가 험해서 이 두 길 외는 다른 길이 없었다. 수천 년간 수많은 군인들이 우두커니 이 길을 지키고만 있었다. 하지만 송규빈은 다른 아이디어를 냈다. 북방 민족은 모두 기병이다. 그 기병들이 이 길을 쉽게 통과한 이유는 산에 나무가 없기 때문이다. 고갯마루와 샛길마다 화전을 금지하고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놓는다면 기병이 험한 산악 지방을 쉽게 통과할 수 없다. 송규빈은 이 작전을 ‘나무성’이라고 불렀다.
 
치열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개선 아이디어
이 아이디어가 좀 진부해 보인다면 더 기발한 것도 있다. 적군이 침입해오는 계절은 대부분 겨울이다. 곳간에 추수한 양식이 쌓여 있어 식량을 현지까지 조달하기도 쉽고, 무엇보다 강이 얼어붙어 도강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송규빈은 여기서도 전술을 착안했다. 겨울에 적이 오면 강의 얼음을 군데군데 깨고 깬 얼음을 쌓아 얼음성을 만든다. 물을 부어 굳히면 쌓기도 쉽고 튼튼하고 미끄럽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얼음구멍 때문에 적은 기동이 불편해지는데, 얼음성은 험하고 미끄러워 공략하기 쉽지 않다. 적이 얼음성에 막혀 강의 얼음 위에 저지되어 있을 때, 매복했던 포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한다면?
 
군대가 아무 곳에서나 도하할 수는 없다. 한강만 해도 광나루, 노량진, 행주나루 정도밖에 없다. 이처럼 도하 지점이 뻔한데다가, 도하를 준비하는 군대는 천생 강가의 모래사장에 포진하게 된다. 이 약점을 노려 모래사장에 폭약을 매설한다면? 오늘날로 치면 지뢰다. 그러나 당시 기술로는 원격 조정으로 지뢰를 폭발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적이 막사를 설치할 만한 예상 지점에 폭약을 묻어놓았다가 포격으로 폭발시키는 것이다.
 
도강 지점인 여울 밑 물속에 마름쇠를 박아놓는다. 그것도 도하 지점 입구가 아니라 끝나는 부분에 집중적으로 매설한다. 왜냐하면 도강하는 부대는 건너편 강기슭이 가까워지면 마음이 급해져서 서둘게 되고 주의력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솜이불 작전도 있다. 솜이불을 대량으로 징발해서 서로 연결하고, 나무를 이용해서 방벽처럼 쭉 걸어놓는다. 여기에 물을 뿌리고, 병사들이 그 아래에 엎드리면 훌륭한 차탄막이 된다. 확실히 군관으로 병사들과 함께 야전에서 많이 생활했기 때문인지 송규빈은 이런 임시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에 강했다. 그리고 꽤 섬세했다. 이런 경험이 없어도 솜이불로 차단막을 설치하자는 생각까지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을 뿌려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을 뿌리지 않으면 솜이불이 바람에 휘날리고 깨끗하게 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송규빈의 이러한 아이디어는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는 치열한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그는 수군으로도 근무했는데, 배에 꽂아놓은 수많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면서 시야를 가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지적은 사소해 보이지만 실전에서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정도로 중요한 지적이었다. 옛날 군대들은 깃발을 너무 중시해서 병사 반 깃발 반이었다. 무선통신이 없던 시절이라 모든 신호와 명령이 깃발로 전달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총과 대포가 발명되자 이것이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깃발은 배와 병사들의 포착과 조준을 훨씬 쉽게 해주었고, 진지 배치도까지 적에게 모조리 알려주었다. 이것을 역으로 이용해서 적을 속일 수도 있다곤 하지만, 장거리 사격이 가능해진 근대 전투에서 깃발의 남용은 위험하고 치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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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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