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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 vs. 실리, 공민왕의 첫 해외 파병

임용한 | 48호 (2010년 1월 Issue 1)
세계 역사상 가장 무섭게 성장한 나라는 몽골제국(원나라)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 끝, 인간의 생존 한계 지역에서 어렵게 살아가던 그들은 한순간에 세계의 절반을 제패했다. 장비라고는 당나귀보다 조금 큰 볼품없는 말이 전부였지만, 용맹성으로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이 확보한 영역의 크기와 정복한 땅의 다양함에 대한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성장만큼 몰락도 빨랐다. 몽골제국은 중원을 정복한 지 100년 만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14세기가 되자 이미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있던 칸의 나라들은 멸망했고, 몽골족이 지배하는 땅은 몽고 본토와 중국 본토만 남았다. 그러나 중원도 안전하지 않았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최초 반란은 1351년 황하 치수를 위해 동원한 인부들이 주동이 되어 봉기한 백련교도의 난이었다. 이들이 머리에 붉은 두건을 써서 표식으로 삼았으므로 보통 홍건적의 난이라고 부른다. 초기 백련교도들의 기세는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우수한 전략가나 지도자를 갖지 못했다는 게 이들의 치명적 약점이었다. 그들은 중구난방으로 흩어졌고, 중국에서 발생한 무수한 농민반란의 전철을 밟아 제각기 광활한 중국 대륙의 끝을 향해 진군하다가 하나둘 소멸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한번 반란의 불을 당기자 보다 위험하고 야심 찬 세력들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지는 양자강 유역인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 일대였다. 이 지역이 반란의 중심지가 된 이유는 기마병 중심인 몽골군이 전통적으로 수전에는 약했기 때문이다. 바다처럼 펼쳐진 양자강과 늪 지대는 몽골군의 진입을 막아주는 천혜의 장벽이었다.

 

 
나중에 명나라의 주인이 되는 주원장도 이때 안휘성에서 봉기했다. 하지만 봉기 당시에 주원장의 세력은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당시 원나라 조정이 가장 주시했던 세력은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를 차지했던 소금 밀매상 출신의 장사성이었다. 주원장의 안휘성은 지금도 가난한 농업지역인 반면 절강성과 강소성은 중국 경제의 중심지였고, 소금 밀매 조직은 가장 탄탄한 실력과 조직력을 갖춘 마피아 집단이었다.
 
원나라의 고려군 파병 요청
위기감을 느낀 원나라는 사위의 나라인 고려에 원병을 요청한다. 1355년 공민왕은 장수 16명과 정예 무사 2000명을 원나라로 보냈다. 이 장수 16명은 유탁, 염제신, 권겸, 원호, 나영걸, 인당, 김용, 이권, 강윤충, 정세운, 황상, 최영, 최운기, 이방실, 안우, 최원이었다.
 
이들은 총병력이 아니라 지휘부와 기간요원이었다. 북경에서 이들은 현지에 살고 있던 고려군을 모집해서 2만3000명의 대군으로 변모한다. 몽골제국은 무역과 상업을 국시로 했던 탓에 수많은 상인과 학자, 무사들이 북경에 진출해 있었다. 그래도 북경에서 2만 명의 대군을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데, 여진족이나 여러 민족의 용병까지 흡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군은 원나라군과 함께 장사성의 근거지인 강소성 고우로 향했다. 이곳에서 고려군은 무려 27회 격전을 치렀다. 고우성 전투 후 고려군은 회안으로 이동 배치됐다. 휴식을 하라는 의미였던 것 같은데, 갑자기 장사성의 대군이 밀어닥쳐 회안성을 포위했다. 장사성 군의 병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들을 실어온 배만 8000척이었다고 한다. 어림잡아 한 척에 40명으로 산정해도 32만 명이다.
 
고려군은 말 그대로 사투를 벌여 성을 사수했다. 장수 16명 중 이권과 최원 등 6명이 전사했다. 앞선 고우성 전투에서 입은 병력 손실은 알 수 없다. 총 병력을 2만 명으로 잡고, 사병의 전사 비율이 장수의 비율과 같다고 본다면 7000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영 장군이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이 전투부터다. 그는 두세 차례 창에 찔렸지만 물러서지 않고 싸워 성벽을 사수했다.
 
고려군이 원나라 군대를 압도하는 놀라운 분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활약은 아직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고려가 원의 속국 비슷한 나라였고, 강대국의 요구에 의해 남의 나라 전쟁에 동원된 파병이었다는 것을 잊고 싶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명분상으로 보면 이 파병은 잊고 싶은 사건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후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파병의 결과는 엄청날 정도다.

 

 
공민왕의 노골적 반원 정책
1356년 1년간 전역을 마치고 파병군이 돌아오자 공민왕은 이들을 해산시키지 않고 압록강 국경에 배치했다. 그리고 공민왕은 전격적인 숙청으로 고려 조정에 있는 친원 세력을 제거하고,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제도와 관습에까지 원나라의 모든 영향을 제거한다. 이것이 유명한 공민왕의 반원 정책이다. 이 민족주의적 혁신 정책으로 인해 공민왕은 리더로서의 무수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고 인기 있는 위인 중 한 명이 됐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1356년의 대숙청과 반전이 공민왕의 민족주의적 의식과 자각의 결과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정말로 위험한 역사 해석이다.
 
공민왕의 대담한 행동이 가능했던 원인은 의식이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이었다. 그 인식과 판단 근거가 바로 이 파병이었다. 고려군은 원나라 군대와 함께 싸우면서 원나라 군대의 전투력을 직접 체험했고, 중국 내부의 상황이 용광로처럼 위험하다는 사실도 간파했다. 어쩌면 후자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원나라와 고려는 사돈 국가였다. 세계의 반을 차지한 원 제국 내에서도 원과 이런 관계를 맺은 국가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원 황실과 고려 왕실의 결혼은 고려 왕족을 몽골족의 혼혈 종족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원의 음모가 아니라 고려 왕실에서 먼저 제의하고 청원한 결과였다.
 
이런 상황에서 원나라가 축출되고 중국에 한족 국가가 다시 성립된다면 고려는 적대 국가가 될 게 분명했다. 이것은 가정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이다. 나중에 일어난 일이지만 명나라 초대 황제인 주원장은 고려가 원의 사돈 국가였다는 사실을 들어 고려를 신뢰하지 않았다.
 
원의 몰락과 뒤이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예감하고, 종이호랑이가 된 몽골군의 전투력을 확인한 고려는 파병군을 원의 지배에 대한 반군으로 전환시켰다. 이들로 압록강에 방벽을 치고, 친원파를 숙청했으며, 숙청 뒤에는 바로 원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안타깝게도 이 군대로 시도한 요동 공략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부대를 다시 동쪽으로 돌려 함경도 일대에 설치한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때 쌍성총관부의 실력자이던 이성계 가문이 원나라를 배신하고 고려로 투항했다.
 
파병의 영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동북아시아 전체가 혼돈으로 빠져든다. 이때부터 고려는 수십 년간 북쪽으로는 홍건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공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전란의 시대를 겪게 된다. 이 전란의 시대에 활약한 고려의 무장들 대부분이 중국 원정 경험자들이었다. 안우와 이방실, 김용, 정세운은 홍건적과의 전쟁에서 맹활약을 했다. 특히 안우와 이방실은 소수 정예 부대를 이끌고 돌격전을 감행하는 등, 최전선에서 싸워 조선시대까지도 높은 추앙을 받았다. 원호는 대대로 무장 가문을 형성했으며, 그의 후손은 임진왜란 때까지 명성을 날렸다. 최영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고려 최고 명장이 되었다.
 
기록에는 남지 않았지만, 참전 경험을 지닌 중하급 장교와 무사, 병사들의 역할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전투 경험이 있는 병사와 없는 병사의 능력은 5∼10배의 차이가 난다.
 
현상의 다양성이 주는 긴장감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명분과 실리라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명분론적 해석은 선과 악의 판별이 쉽고 분명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사의 지극히 제한된 한 단면만 보는 행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공민왕의 반원 정책이 공민왕의 민족정신과 자주정신이었다는 해석처럼 사건의 원인과 교훈을 오도하게 만들고, 현실을 올바르게 분석해 교훈을 찾는 능력을 감퇴시킨다.
 
반면에 실리만을 추구하다 보면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지고, 거시적 이익을 오히려 놓치는 위험에 빠지기 쉽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모든 현상에는 여러 가지 얼굴이 있다는 진리를 기억하고, 다양한 관점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지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긴장감을 싫어한다. 그리고 경험, 경력, 직위, 나이 등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이 긴장감에서 벗어나 쉽고 편안한 결론을 즐기려 한다. 우리가 자기 계발에 실패하거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지식과 경험은 현상의 다양성과 사고의 복잡성을 키워가는 과정이다. 경험과 경륜이란 현상의 다양성이 주는 피로와 긴장감을 이겨내고 즐기게 만드는 과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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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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