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군사 분야에서 우리나라 군대의 전통적인 장기는 무엇일까? 요즘도 세계 최강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궁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반면에 기병은 산이 많은 우리나라 지형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재상과 장군들이 손꼽는 우리의 최고 장기는 기병과 활의 결합, 즉 궁기병(弓騎兵)이었다.
산이 많아 기병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은 커다란 오류다. 유명한 고구려의 기병도 만주 평원에서 양생된 게 아니었다. 광개토대왕 시절에도 고구려의 중심지는 험악한 산악지방이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고 온갖 기마술을 보여주는 마상재(馬上才·말 위에서 보여주는 재주)는 중국과 일본에까지 명성을 떨쳤을 정도로 유명한 조선의 국가적 자랑거리였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토인비의 말처럼, 험한 지형 탓에 한국의 기마술은 묘기 수준으로 발전했고 한국군의 주력이 됐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더 힘든 훈련과 더 좋은 말이 필요했다.
중국, 일본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조선 궁기병
조선 궁기병의 실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골칫거리는 왜구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은 육전에선 무참하게 패배했지만 해전에서는 승리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육군이 강하고, 우리는 수군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은 왜구와 바다에서 싸우는 것을 꺼렸다. 왜구를 육지로 유인해서 싸워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의외지만 백병전에 관한 한 왜구는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중국군이 소림사의 무승 등 강호의 고수까지 동원하고도 이기기 힘들었던 상대가 바로 왜구였다. 이런 백병전의 달인을 상대로 조선이 육상전을 자신했던 근거가 궁기병이었다.
고려 말에 왜구가 강릉을 침공한 적이 있었다. 이때 강릉의 말단 병사, 이옥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고려 말에 간신으로 악명이 높은 권력자였던 이춘부의 아들이다. 이춘부가 살해되자 이옥은 일반 병사로 강등돼 강릉으로 쫓겨났다. 왜구가 쳐들어오자 명예를 되찾을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이옥은 단신으로 말을 타고 해안에 자리 잡은 왜구의 진지로 달려가 화살을 퍼부어댔다. 그를 잡기 위해 왜구가 구름 같이 몰려나왔다. 아무리 사격을 잘해도 화살통에 꽂을 수 있는 화살은 20발 남짓이었다. 혼자서 수백 명을 당할 수는 없었다. 화살이 떨어진 이옥은 말을 되돌려 해안의 방풍림 속으로 달아났다. 분노한 왜구는 놓치지 않겠다며 뒤쫓아 왔다.
그러나 전날 밤 이옥은 하인을 시켜 숲속 나무 곳곳에 화살 수백 개를 꽂아 놓았다. 이옥은 말을 타고 달리며 이 화살들을 뽑아 왜구를 쏘고 다시 달리는 ‘히트 앤드 런(hit and run)’ 작전을 구사했다. 그렇다고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왜구 중에서도 말 탄 장수는 있었을 것이다. 말을 달려 내빼며 멀리 떨어져 싸우면 안전하기는 하지만 말이 금방 지친다. 이옥은 아슬아슬하게 왜구를 근접시켜 놓고 활을 쏜 후 살짝 달아나곤 했던 모양이다. 왜구와 근접해 있으므로 한 번만 사격에 실수를 하거나 말에서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활을 쏘아야 하므로 손으로 고삐를 잡을 수도 없다. 오직 다리와 허리만으로 무게 중심을 잡고, 말을 조정하면서 나무 사이를 지그재그로 달려야 한다. 말은 조금만 놀라거나 나무뿌리 같은 장애물을 만나 스텝이 엉키면 갑자기 멈추거나 날뛴다. 왜구도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한번만 걸려라”고 이를 갈며 그를 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옥은 신기에 가까운 기마술과 활솜씨를 발휘해 끝내 실수를 하지도, 잡히지도 않았다. 저녁이 되어 왜구도 진정을 하고 보니 화살에 맞아 죽고 부상한 사람이 즐비했다. 이옥 단 한명에게 우롱당해 전력을 크게 상실한 왜구는 강릉 약탈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 공으로 이옥은 복권됐고, 이성계 휘하에서 명장으로 명성을 날리며 고관으로 승진했다.
궁기병의 기본은 우수한 종마(種馬)
이런 식으로 싸우려면 훈련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말도 보통 말로는 어림없다. 우수한 말을 얻으려면 먼저 우수한 종자를 얻어야 한다. 오늘날 강대국들이 신무기 개발에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쏟아 붓고 있지만, 옛날 제국들이 말에 들인 정성과 비용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말에 관한 열정의 전설적인 사례는 기원전 2세기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무장 이광리의 대완국 정복이다. 한 무제(武帝)가 국력을 기울인 이 전쟁의 목적은 대완국에 있다는 천리마였다. 당시 한나라는 흉노와 결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흉노의 기병 때문에 고전하고 있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기병보다 전차를 선호했다. 그러나 전차는 흉노의 기병을 당할 수 없었다. 뒤늦게 기병을 양성했지만 문제는 말이었다. 마차를 끄는 투박한 말은 흉노의 기마와는 수준이 달랐다. 한나라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오늘날 아랍종 계통의 말로 추정되는 서역의 명마가 절실했다. 정복에 성공한 이광리는 종마와 3000마리의 군마를 끌고 개선했다. 이후 한나라 군의 전력은 크게 상승했다. 말의 변화는 무덤에서 발굴되는 부장품에서도 드러난다. 유명한 진시황의 병마용에서 발굴된 말들은 전차용 말로서 머리가 크고, 통통하고, 튼튼하게 생겼다. 반면 한나라의 무덤에서 나온 기마 인형들은 체격이 더 크고, 머리가 작고 엉덩이가 커서 몸 전체가 유선형을 이루는 늘씬한 말들을 타고 있다.
부장용 토용과 그림에서 서역 말이 인기를 끈 이유는 오늘날의 경주마를 연상시키는 멋진 근육과 잘 빠진 몸매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지구 한 구석에 숨어 있던 진짜 명마가 등장했다. 징기스칸의 전설을 이룬 몽골말이다. 몽골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막상 몽골말을 보면 실망 그 자체다. 체격은 조랑말보다 약간 큰 정도고, 머리는 말과 당나귀의 혼혈처럼 느껴질 정도로 크고 둔탁하다. 그러나 이 말은 세계 최고의 지구력과 체력, 열대에서 한대까지 어디든지 가는 강인함과 인내심을 갖췄다. 물론 몽골말이 모든 점에서 일등은 아니다. 순간적인 힘과 스피드는 체격이 좋은 서역마가 우위였다고 한다. 그러나 군마로서의 보편적 자질은 몽골말이 우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