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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영국 vs 프랑스, 훈련의 땀이 병사의 수보다 强하다

임용한 | 65호 (2010년 9월 Issue 2)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00년 전쟁이 진행 중이던 1346년 여름,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프랑스 노르망디(프랑스 북서부)의 쉘부르 해변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원래 프랑스왕의 공격을 받고 있는 영국령 가스코뉴(프랑스 남서부의 옛 지명. 당시 영국 왕실은 프랑스에서 이주한 가문으로 프랑스에도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를 돕기 위해 편성한 증원부대였다. 그런데 영국을 출발한 뒤 역풍을 만나 엉뚱한 곳에 상륙했다. 원래 목적지였던 가스코뉴로 가기는 틀렸지만, 에드워드는 기왕 상륙한 김에 군대를 진군시켜 캉(프랑스 북서부 칼바도스주의 주도)을 함락하고 약탈했다.

14세기에 한국이나 중국에서 왕이 직접 전투를 지휘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혹 전투에 얽혀 들었다고 해도 전술적 목표가 사라졌다면 당장 철수해야 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적의 영토 안에서 한가하게 약탈 전쟁이나 벌이고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당시 군대는 소수의 귀족 장교와 기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보수를 받고 참전하는 전문 군인이었다. 군대를 만들려면 돈이 필요했다. 에드워드도 가스코뉴 증원 부대를 편성하기 위해 꽤 많은 투자를 해야 했으므로 잘못 상륙했더라도 밑천은 뽑고 돌아가야 했다.

한편 영국 왕이 엉뚱한 곳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왕 필립 6세는 전국 각지의 영주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프랑스도 영국식 징병제도를 도입하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영주와 기사의 충성에 의존하는 중세적 징병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일부 고용병 부대는 직업 군인이라기보다는 용병에 가까웠다. 둘의 차이가 애매하기는 하지만, 국왕에 대한 충성도와 도덕성, 전투 의지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겨우 1만 명의 병력 밖에 없었던 에드워드는 그 소식을 듣는 즉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해변으로 돌아와 보니 배들이 모두 도망치고 없었다. 에드워드가 살 길은 프랑스 북쪽, 즉 지금의 프랑스와 벨기에 사이에 있는 플랑드르 지역으로 철수하는 방법뿐이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프랑스군의 작전은 강의 다리를 끊어 필립의 본대가 올 때까지 영국군을 묶어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군은 번번이 탈출에 성공했다. 센강에서는 끊기지 않은 다리를 찾아 수비대를 격파하며 돌파했다. 솜강에서 영국군은 완벽하게 함정에 갇혔다. 앞에는 강, 뒤에는 프랑스군이었다. 1346 8 23,에드워드는 강을 건널 방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에게 후한 상을 주겠다고 현상금을 걸었다. 지역 주민 한 명이 썰물이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을 가르쳐 주었다. 강물은 겨우 허리까지 찼다. 영국군은 후위부대가 프랑스군을 막고, 전위부대는 강 건너편 프랑스 수비대를 격파하는 방식으로 솜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강 건너편에는 프랑스군 3500명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 중 500명 정도가 중무장한 기사와 보병이었다. 영국군 궁수들은 강 중간까지 걸어 들어가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로빈 후드의 활로 유명해진 영국군의 장궁은 최고의 비밀병기로 프랑스군이 사용하는 석궁보다 사거리가 5배나 길었다. 위력도 막강해서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사와 말을 한번에 꿰뚫을 정도였다. 프랑스군이 사격을 버티지 못하고 강 언덕에서 퇴각하자 영국의 장갑보병들이 재빨리 진격해서 강 언덕을 확보했다.

프랑스군 추격대는 선발대가 영국군을 따라 잡았지만, 본대가 도착하지는 못했다. 영국군이 강에 있는 동안 그들은 공격을 망설였고, 영국군은 탈출에 성공했다. 이 성공이 영국군 후위의 성공적인 작전 덕분이었는지, 프랑스군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러나 프랑스 기사들은 행동이 부자유스러운 강물에서 이미 건너편 강 언덕에 포진한 영국군 궁수들의 화살 세례를 받는 게 힘겨웠을 수도 있다.

영국군은 아슬아슬하게 솜강을 건넜지만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영국군은 너무 지쳐 더 이상 프랑스군보다 빨리 갈 수 없었다. 이대로 무모한 행군을 계속하다가는 체력이 바닥날 게 뻔했다.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으면 제대로 저항조차 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체력이 남아 있을 때 싸워야 했다. 8 26, 크레시 마을 근처에서 에드워드는 결전을 작심했다. 그는 예하 부대에 수비대형을 갖추고 참호를 파라고 지시했다.

 

영국군은 크레시 숲을 배경으로 언덕에 진을 쳤다. 우익에는 작은 강이 흘러 천연장벽을 형성했다. 좌익은 안타깝게도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비탈이었다. 중앙은 산비탈을 깎아 만든 계단형 경작지로 3단으로 구성돼 있었다. 폭은 300m 정도로 좁고, 층이 져 있어 기병의 돌격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방어상으로 취약한 곳은 좌익이었지만 에드워드는 경사가 급한 우익이 격전지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프랑스군이 진격해 오는 도로 쪽과 우익이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대를 셋으로 나눠 좌익과 우익에 하나씩 배치하고, 중앙부는 예비대로 약간 뒤쪽에 두었다. 각 부대는 말에서 내린 기사와 갑옷을 입은 창병으로 구성됐다. 이중 최정예 부대는 우익에 배치하고, 유명한 에드워드 흑태자에게 지휘를 맡겼다. 흑태자는 이때 17살이었다. 영국군의 비밀병기인 장궁병도 나누어 장갑병의 양 측면에 두는 형태로 배치했다. 배치가 끝나자 에드워드는 우익 진영 옆에 있는 풍차간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지형상 가장 높은 곳으로 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영국군이 포진한 전선의 길이는 약 1.8km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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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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