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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가 두렵잖은 열정, 창업가 정신을 배우다

이재후 | 91호 (2011년 10월 Issue 2)




 
편집자주 DBR은 세계 톱 경영대학원의 생생한 현지 소식을 전하는 ‘MBA 통신’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매사추세츠공대(MIT) 슬론 스쿨,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LBS), 중국 유럽국제공상학원(CEIBS) 등에서 공부하고 있는 젊고 유능한 DBR 통신원들이 따끈따끈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통신원들은 세계적 석학이나 유명 기업인들의 명강연, 현지 산업계와 학교 소식을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Stanford Graduate School of Business)은 미국 서부 실리콘밸리의 심장부에 위치해 미국 IT 산업의 두각과 함께 최고의 경영대학원으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처음 스탠퍼드에 와서 장을 보러 가다가 길을 잘못 들었더니 구글(Google) 타운이 나오기도 했다. 또 MBA 1년 선배 집에 초대 받아서 가보니 페이스북(Facebook)의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가 초창기 사업을 벌이던 아지트였다. 과거 30년, 그리고 현재까지 미국의 IT 혁명을 이끌어 가는 대부분의 회사들 - 애플, 구글, 페이스북, 오라클, HP, 시스코 - 이 하나같이 이곳에서 벤처회사로 태동해 위대한 회사로 성장했다. IT 산업뿐 아니라 BT, NT, 그리고 CT(Cleantech)의 대표 기업들이 이곳에서 거대한 꿈을 실현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실리콘밸리와 인접해 미국 이노베이션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만의 독특한 학풍, 유명한 창업가와 벤처투자자의 강연을 통해 알게 된 실리콘밸리 내 벤처의 세계, 그리고 그를 통해서 배운 창업가 정신의 배양에 대한 견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실패한 창업자가 인정받는 학교
 
스탠퍼드 MBA 한국인 환영행사에 나갔을 때 일이다.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한 선배가 우스갯소리로 “저는 스탠퍼드에서 그렇게 창업자 (entrepreneur) 교육을 받고도 부끄럽게도 아직도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꼭 사업을 하고 있겠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스탠퍼드 MBA에 오기 전 글로벌 경영 컨설팅 회사에서 일했던 필자로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분위기였다.
 
스탠퍼드 동문회의 그러한 분위기는 학교에 온 첫 주부터 금새 이해될 수 있었다. 한 학기를 함께 할 스터디그룹을 배정받았는데 그중 맷(Matt)이라는 친구는 MBA에 오기 전 Juicy Campus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했다고 소개했다. Juicy Campus는 무기명을 원칙으로 대학생들 사이의 각종 뒷담화가 오가던 웹사이트였다. 이 웹사이트는 순식간에 인기를 얻어 미국 내 주요 대학별 포스트를 열었고 맷은 CNN 등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유명 인사가 됐다. 유명 벤처캐피털의 투자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에게 머지않아 시련이 닥쳤다.
 
‘듀크대에서 가장 뚱뚱한 여학생 순위’ ‘아이비리그에서 가장 몸매가 훌륭한 풋볼 선수 순위’ 등의 인신공격성 글이 게시판을 잠식하면서 사이트의 무기명성에 잠재해 있던 역기능이 부각됐고 맷은 비도덕적인 창업가의 이미지로 각종 언론 매체의 뭇매를 맞으며 웹사이트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투자자들은 투자금을 몽땅 잃었고 맷은 그의 사이트로 상처받은 사람들에 의해 고소의 위협 등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서 맷은 어떤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실패한 창업가나 비도덕적인 젊은이로 비쳐지고 있을까? 아니다. 맷의 도전은 모든 친구들에게 흥미의 대상일 뿐 아니라 배움의 대상이다. 심지어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세미나를 열어 그 친구의 실패 얘기에 귀를 기울였고 강의가 끝났을 때는 기립박수를 쳐주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맷은 과거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찾고 있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옆자리에 앉은 맷을 보니 스마트 펜과 스마트 노트라는 특이한 제품을 가지고 필기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반 펜과 노트처럼 보였지만 스마트 펜에는 강의의 핵심내용이 나올 때 녹음하는 기능이, 스마트 노트에는 필기한 곳을 클릭하면 스마트 펜으로 녹음한 것이 재생되는 기능이 들어 있었다. 컨설팅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인터뷰를 해야 했던 필자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제품으로 보였다.
 
스탠퍼드에는 맷처럼 과거에 창업을 했거나 다른 독특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많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서는 이런 다양한 친구들의 성공과 실패한 실감나는 얘기들을 듣기 위해 ‘토크(TALK)’ ‘주니어의 관점(View from the bottom)’ 등의 이름으로 편안한 대화의 장이 매주 열린다. 이런 자리를 통해 실패가 새로운 창업의 자양분이 되는 곳이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이다.
 
 
벤처캐피털과 엔젤 인베스터, 그들은 무엇을 보고 투자하는가
 
 
 
 
 
스탠퍼드의 점심식사 시간은 여타 미국 경영대학원과 마찬가지로 유명한 외부 인사의 강연 시간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초청 외부 인사의 스펙과 경력에 있어 스탠퍼드는 확실한 차별성이 있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은 세계 최고의 벤처캐피털인 세쿼이어캐피털(Sequoia Capital), 클라이너 퍼킨스 (Kleiner Perkins), 드레이퍼 피셔 쥬벳슨 (Draper Fisher Jurvetson) 등이 모여 있는 샌드힐로드(Sand Hill road)와 페이지밀로드(Page Mill road)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만나보기 매우 어려운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창업자와 벤처투자자의 강의를 듣는 행운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성공한 창업의 비밀에 대해서 아이디어, 사람, 팀, 실행력 등 각각의 고유한 관점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벤처캐피털의 꿈 세쿼이어캐피털(Sequoia Capital)의 창업자 돈 밸런타인 (Don Valentine)과 창업자의 대부 엔젤 인베스터의 상징 론 칸웨이(Ron Conway)의 강연 간의 공통점과 차이는 그들이 IT 혁명에 미친 영향만큼이나 흥미로웠다.
 
세쿼이어캐피털(Sequoia Capital)  돈 밸런타인 (Don Valentine)
 
실리콘밸리에서 세쿼이어캐피털로부터 투자를 받는 것은 IT 산업의 차세대 아이콘으로 가는 직행열차로 통한다. 애플, 야후, 구글, 오라클, 시스코, 유튜브, 페이팔, 링크트인 등은 모두 사업 태동기에 세쿼이어캐피털의 투자를 받았다. 오히려 미국 IT 산업 아이콘 중에서 세쿼이어캐피털로부터 투자를 받지 않은 회사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필자는 궁금했다. 세쿼이어캐피털은 무엇을 보고 투자할까? 투자 이후 어떠한 방법으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젊은 청년을 성공한 사업가로 키워줄까?
 
세쿼이어캐피털의 돈 밸런타인의 모습은 등장부터 필자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벤처사업가들을 도와주는 인자한 켄터키 치킨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투자자의 모습이었다. 돈 밸런타인이 투자 시 가장 중요하게 보는 첫 번째 요소는 ‘거대한 시장 잠재력’이다. 그는 창업자나 팀보다 사업 아이템이 가지고 있는 시장의 잠재력에 주목했다. 디렉토리 기반의 검색에서 지능형 검색으로의 진화를 모색한 구글, 네트워크 시장의 진화에 따른 장비에 대한 핵심기술을 보유한 시스코 등의 투자에서 보여준 것처럼 100억 달러 이상의 대규모 잠재시장을 찾고 그 안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1∼2개의 회사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그들의 방법이었다. 파괴적 아이디어 (Disruptive technology)를 갖춘 기업이라면 세쿼이어캐피털이 보유한 역량 및 네트워크를 동원해 경우에 따라서는 경영진 보강 및 교체를 통해 투자한 기업이 보유한 아이템을 사업화했다. 창업자와 벤처캐피털 리스트 간에 열정적인 창업자와 멘토의 관계를 기대하던 필자에게 돈 밸런타인의 시스템적 투자 접근법은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게 했다.
 
엔젤 인베스터의 대부 론 칸웨이 (Ron Conway)
 
실리콘밸리의 창업가들에게 사업화 이전인 시드(seed) 단계에 투자를 하는 자본으로는 벤처캐피털과 함께 엔젤 인베스터가 있다. 엔젤 인베스터란 부를 축적한 개인이 가능성이 높은 창업가의 회사에 직접 또는 펀드를 통해 투자하는 모델을 말한다. 엔젤 인베스터는 창업가에게 일종의 후견인 또는 대부와 같은 존재이다. 실리콘밸리의 엔젤 인베스터 중 론 칸웨이는 구글, 페이팔, 냅스터(Napster), 트위터, 포스퀘어(Foursquare) 등 실리콘밸리가 주목하는 인터넷 기업들에 사업 시드 단계에 투자해 왔다.
 
론 칸웨이에게는 필자가 기대했던 켄터키 치킨 할아버지의 모습이 있었다. 그는 투자 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로 ‘잠재력 높은 창업자와 팀’을 꼽았다. 그에게 있어 사업 아이디어는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두 가지 이유에서 ‘잠재력 높은 창업자와 팀’에 대해 강조했다. 첫째, 훌륭한 창업자와 팀은 충분히 매력적인 아이디어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명한 IT 회사에서 한 제품 라인을 총괄하던 사람을 벤처회사의 초기 멤버로 영입한다고 생각해 보자. 괜찮은 보수와 괜찮은 회사 명성을 포기하고 적은 보수와 아무도 모르는 벤처회사에 들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기존 직장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고 있는 훌륭한 인재라면 더더욱 그렇다. 론 칸웨이는 훌륭한 팀 멤버를 갖추고 있는 벤처회사는 창업자의 역량, 열정, 설득력, 그리고 사업 아이디어의 매력도가 이러한 인재들의 인생을 건 결정을 끌어낼 만큼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역설했다.
 
둘째, 훌륭한 팀은 강력한 실행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창업을 한 후 초기 6개월간은 시장의 반응에 따라 적극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 타깃 고객이나 제품의 큰 변화를 수반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장의 반응을 읽고 적극적으로 대응해내는 실행력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특허 등의 지적재산권으로 아이디어가 보호되기 어려운 인터넷 비즈니스의 경우에는 고유한 아이디어만큼이나 그 아이디어를 빠르게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투자 철학을 바탕으로 론 칸웨이는 잠재력이 크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산업에 대해 ‘잠재력이 높은 창업자와 팀’으로 구성된 벤처회사에 투자하고 있다.
 
‘파괴적 아이디어’에 투자하는 돈 밸런타인과 ‘잠재력 높은 창업자와 팀’에 투자하는 론 칸웨이는 성격, 투자 철학, 산업별로 투자하는 회사 수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지만 훌륭한 창업자가 되기 위한 길에 대해서는 정확히 공통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둘 모두 사업을 론칭해보고 운영해본 경험이 창업자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사업의 론칭이 성공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실패의 경험도 매우 소중하다고 평가했다. 그들은 골드만삭스, 베인앤컴퍼니, 맥킨지앤컴퍼니와 같은 명망 있는 회사에서 일한 사람들끼리만 모인 팀보다 대학 졸업 후 벤처 회사에서 자그마한 성공 및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로 구성된 팀에 보다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기술 회사에서 일한 경우에도 전략이나 M&A팀 등 MBA 졸업생들에게 매력적인 것처럼 보이는 팀에서 커리어를 쌓은 사람들보다 작더라도 하나의 제품 라인을 담당하던 사람들에게 훨씬 후한 점수를 주고 있었다. 그들은 위험을 감수하는 태도와 실제로 사업을 론칭하고 운영한 실질적 경험만이 성공한 벤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창업할 수 있는 환경, 창업을 주저하게 하는 환경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서의 생활이 지속될수록, 그리고 창업을 장려하는 분위기를 경험할수록 필자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생겼다. ‘도대체 한국에는 왜 창업자가 많지 않을까?’
 
이제 한국도 fast follower 역할뿐만 아니라 시장의 새로운 테마를 창조해낼 수 있는 성공한 창업가가 많은 혁신의 나라로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스탠퍼드의 벤처 환경을 눈으로 보면서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벤처 환경이 무엇일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우선, 표면적인 첫 번째는 인재풀의 차이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서 놀란 점은 수업시간에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학생의 상당수가 사업 아이템과 창업에 매진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글로벌 컨설팅회사나 투자은행 등이 보유한 지위 및 안정성에 매료되지 않고 세상을 뒤흔들고 발전시킬 수 있는 파괴적 기술에 열광한다. 실제로 MBA 이후 커리어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서머인턴 시기에 그런 학생들은 방학 전 구상했던 사업 아이디어를 실행하고 개강시기에 맞춰 사업을 론칭한다. 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오늘 하루에만 같은 클래스의 학생들로부터 세 건의 웹사이트 론칭 e메일을 받았다. 한국의 대학에서 똑똑한 친구들의 상당수가 고시를 준비하거나 정부기관 혹은 외국계 회사에 취직하려고 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다. 최고 인재들이 만든 웹사이트를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한다.
 
둘째는 에코시스템의 차이다. 실리콘밸리에서는 투자자와 동업자를 찾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확실한 사업 아이디어와 팀만 있으면 언제든지 투자하려는 페이지밀 로드 (Page Mill Road)의 벤처캐피털이 있다. 또 이미 성공을 해본 창업자와 창업 전문 마케팅 전문가, 특급 개발자들이 휴식을 취하며 다음 벤처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사업규모가 1000만 달러에서 1억 달러 수준이 되면 창업자들이 사업을 마무리(exit)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돼 있다. 구글, 페이스북, 오라클, HP 등 IT 공룡들은 300조 원의 현금을 바탕으로 벤처회사를 경쟁적으로 인수하기 때문에 매력적인 회사만 만들면 제값에 팔 수 있다.
 
셋째는 ‘실패’에 대한 사회적 용인의 차이다. 필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 부분의 차이가 실리콘밸리와 한국 벤처 환경의 차이에서 매우 큰 부분이라고 느꼈다. 한국에서는 벤처를 하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든 ‘패배자’로 낙인이 찍힌다. 유한회사로 창업을 했다 하더라도 창업자가 경제적 손실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서의 ‘실패’는 ‘배움’의 훈장과 같은 것이다. Juicy Campus로 ‘실패’한 필자의 교우 맷은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여름 책을 집필했다. 스탠퍼드 경영대 교수와 링크트인의 창업자의 추천 코멘트도 표지에서 볼 수 있다. 돈 밸런타인, 론 칸웨이, 그리고 그 외에 스탠퍼드에서 강연한 대부분의 벤처캐피털 리스트들이 그들의 투자 대상으로 비즈니스 엘리트보다는 ‘실패’한 창업자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실패’한 창업자가 미래의 마크 주커버그(페이스북 창업자)가 될 수 있음을 알기에 ‘실패’한 창업자에게는 두 번째, 세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 회사의 손실에 대해서 개인에게 무한책임의 굴레가 지워지는 것도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창업을 장려하는 사회로의 일보진전을 기대하며
 
필자가 스탠퍼드에서 1년간 여러 국가에서 온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알게 된 점은 한국의 다소 아쉬운 벤처 환경이 한국만의 특별한 점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실리콘밸리의 벤처 환경이 전 세계적으로 보기 힘든 매우 고유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페인에 글로벌 스터디 트립(Global study trip: 글로벌 마인드 배양을 목적으로 특정 국가의 정치, 경제 명사 및 문화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을 갔을 때 스페인의 성공적 벤처 사업가는 “스페인의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태도가 보다 많은 창업자의 발굴을 제한합니다”라고 얘기했다. 동행했던 일본, 대만, 중국, 브라질, 멕시코, 유럽 출신의 학생들과 토론하면서도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태도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의 국제 비즈니스 거장 윌리엄 바넷(William Barnet) 교수는 국가의 기술개발 모델이 혁신실험적 모델(Explorative model)과 집중실행적 모델(Exploitative model)로 나뉜다고 설명하면서 한국을 대표적인 집중실행적 모델의 예시로 들었다. 바넷 교수는 한국이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압축성장을 하기 위해 국가주도의 경제정책, 대기업의 선별된 산업 집중 투자, 빠른 업무추진을 위해 훈련된 근면한 인력, 표준화되고 규율화된 교육제도 등 집중실행적 모델에 최적화된 에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필자는 수업을 들으면서 한국이 벤처하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 그동안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엄격한 비판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오히려 집중실행적 모델의 성공적 예시로 소개될 만큼 우리에게 자부심을 느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업을 장려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지난 몇 십 년간 한국 사회를 지탱해온 인재 모델과 시스템 모두의 변화를 요구하는 매우 광범위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첫발이 무엇이어야 할까에 대한 한 가지 대안을 얻은 것은 적지 않은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실패’를 용인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및 제도의 보완, 그리고 ‘실패’를 통해 성공한 역할 모델의 축적이 보다 많은 인재를 창업의 세계로 이끌고, 보다 많은 창업 인재의 누적이 에코 시스템의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재후   Stanford GSB School Class of 2012   [email protected]
 
필자는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후 글로벌 전략컨설팅 회사인 베인앤컴퍼니에서 성장전략 및 M&A 분야를 중심으로 컨설팅을 수행했다.
 
스탠퍼드 GSB(Graduate School of Business)는 1925년 설립됐다. 미국 동부에 몰려 있는 대부분의 유명 MBA 스쿨과 달리 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실리콘밸리가 가까워 기술 관련 기업으로 진출하는 졸업생들이 많다. 지원자에게 매우 높은 GMAT 점수를 요구하며 2009년에는 지원자의 6.7%만이 입학했을 정도다. 한 학년의 정원이 900명 내외인 하버드 MBA나 와튼 MBA와 달리 360명 내외의 비교적 적은 정원을 유지한다. 때문에 다른 학교에 비해 교수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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