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8세기 말엽, 혹은 9세기 초반 궁복과 정년이라는 두 신라 청년이 중국(당시 당나라) 땅에 내렸다. 그 당시 중국은 위험한 땅이었다. 당나라는 중앙 정부가 통제력을 잃었다. 각지에서 절도사들이 정치와 군사력을 장악했고 반란과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반면 신라는 곧 무너질 평화이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는 평화로운 편이었다. 두 청년은 안전한 고국을 떠나 위험하고 낯선 세계로 뛰어들었다.

청년 궁복, 당나라에서 기회를 잡다

이들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도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확실하진 않지만 당시 신라에서는 잡을 수 없는 ‘기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난세와 전쟁은 위험하지만 그만큼 도전하는 자에게는 기회를 제공한다. 궁복과 정년은 중국에서도 당할 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무사였다. 그러나 신라는 지독히 고루하고 폐쇄적인 나라였다. 김씨 왕족들이 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인물도 이 좁은 혈맥의 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통일신라 시절에 많은 젊은이들이 중국으로 떠났다. 심지어 왕족 중에서도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 정착해버린 인물이 꽤 있었다. 서유기의 삼장법사 모델로 유명한 현장법사의 수제자가 원측(圓測)대사인데 그도 신라 왕자였다. 심지어 왕자까지 나라를 등지고 떠나는 판에 고향이 어딘지도 알려지지 않은 어느 바닷가 시골 출신의 청년들이 신라에서 꿈을 이루기란 불가능했다.

아마도 이때 멀리 중국에서 기회의 목소리가 온 듯하다. 당시 산둥에는 신라인 무역회사와 고구려 유민세력이 상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당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고구려 유민의 후예인 이정기 일가가 산둥을 점거하고 한때 낙양을 위협했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이 당나라군과 전쟁을 치렀던 시기에 궁복과 정년은 중국에 들어갔고 둘 다 입대해 무령군 소장이 됐다. 이 직위는 1000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는 중급 장수였다.

장보고, 청해진 건설로 한중일 무역로 장악

궁복은 아마 이때 그의 이름을 장보고로 바꾼 게 아닌가 싶다. 무령군은 당나라가 산둥회복을 위해 동원한 군대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인, 고구려 유민과 산둥의 이씨 정권, 당나라와의 관계는 일괄적이지 않고 복잡 미묘했던 것 같다. 장보고의 중국에서의 활동 내역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른 장보고가 흥덕왕(826∼836) 때 신라로 귀국, 왕에게 완도에 청해진을 개설하자고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장보고가 귀국한 이유는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인을 잡아다 노예로 파는 것을 보고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이 말이 당나라의 노예선들이 신라 해안가를 습격해 신라인을 납치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무렵 산둥의 정세를 보면 단순히 그런 의분이 아니었다. 산둥의 이씨 정권이 몰락하고 전란이 가중되면서 산둥을 기반으로 신라와 일본의 무역로를 운영하던 신라 상인과 고구려 유민들이 여러 가지 타격을 받았던 것 같다. 장보고는 기왕에 구축해놓은 이 탄탄한 무역기반을 신라가 적극 나서서 보호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것은 신라 왕실에도 막대한 수입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흥덕왕은 이 제안을 수락하고 장보고에게 만 명의 군대를 내주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건설하고 한중일의 무역로를 장악함으로써 오늘날 ‘해상왕’이라고 불리는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러나 흥덕왕이 죽자 신라도 끝내 내전에 돌입했다. 왕위 계승을 두고 흥덕왕과 사촌지간이며 서로 삼촌, 조카 관계인 김균정과 김제륭이 무력으로 충돌했다. 이 충돌에서 김균정이 사망하고 김제룡이 희강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과 김균정의 심복인 김양(무열왕의 후손으로 김균정과는 친족이다)은 달아났다. 희강왕 측은 2년이 넘도록 이들을 체포하지 못했다. 승자인 희강왕 측도 분열과 대립이 심했기 때문이다. 희강왕도 3년 만에 자신을 추대했던 김명, 이홍 등에게 몰려나 자살하고 만다. 희강왕이 죽자 김명이 즉위해 민애왕이 됐다. 하지만 분열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속으로 곪아 있던 신라 왕가는 한번 내전이 터지자 순식간에 분열했다. 전국의 도지사, 시장은 모두 왕족이 장악하고 있던 탓에 왕족이 분열하자 중앙 정부는 지방과 지방민에 대한 통제력을 바로 잃어버렸다.

김우징과 김양은 청해진으로 가서 장보고를 포섭했다.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로 삼는다는 조건이었다. 장보고의 가세는 신라의 폐쇄성에 숨 막혀 하던 차상위 계층과 지방 세력에게는 고무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장보고 측은 이 상징성을 십분 활용했다. 청해진의 병력으로 청해진과 가까우면서 옛 백제 땅이어서 신라 정부에 불만이 많았을 호남지방을 먼저 공략했다. 게다가 김양은 예전에 광주를 통치한 적이 있었다. 장보고군은 광주, 남원, 나주를 차례로 공략하고 지방 세력의 호응을 끌어냈다. 이들은 남원과 나주에서 신라 정부군을 연이어 격파했다.

나주 전투에서 장보고 측 정예 기병 3000명이 돌격해 정부군 진영을 완전히 유린해버렸다. 전황이 자세하지 않지만 양측의 실전능력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압승의 비결은 풍부한 실전 경험과 실전으로 검증한 능력본위의 인재등용이었다. 청해진 군대는 중국과 일본의 해적과 맞서 싸우며 늘 해상 무역로를 관리하던 부대였기 때문에 실전경험이 풍부했다. 그리고 이런 실전을 바탕으로 무장을 뽑았던 것 같다. 이 전투에서 김우징 측이 내세운 장수 가운데 김씨는 하나도 없다. 장보고의 친구였던 정년과 장보고의 일족이 아닐까 추정되기도 하는 장병과 장건영, 장보고의 부하들인 염장, 낙금, 이순행 등이 선봉에 섰고, 이들은 하나같이 맹장이었다.

반면 신라군은 통일 후 우리 역사상 최장의 평화기를 누린 덕에 100년 이상 실전을 경험하지 못했다. 여기에 고급 장교는 김씨가 독점했고 그 아래도 웬만하면 서라벌과 중심 지역의 옛 지배층을 우대했다. 경쟁도 없고 동기도 없는 타성에 젖은 집단. 이런 귀족 군대는 생동감을 상실하고 금세 무능해진다. 20세기 초반에도 이런 군대를 지닌 나라가 여러 군데 있었는데 장교들이 작전 지도도 보지 못하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제식훈련 때 구령붙이는 것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8세기 신라군의 실상은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가 없지만 정황으로 봐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839년 반군은 드디어 대구로 진격했다. 반군 병력은 알 수 없지만 정년이 지휘하는 청해진 병력은 5000명이었다. 정부군도 총력을 기울여 10만 명을 동원했다. (10만 명은 신라의 장부상 총병력이고 대구 전투에 투입한 병력이 10만 명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수적으로 정부군이 반군 대비 우세했던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지휘관은 김양의 사촌인 김흔이었다.

병력이 우세했던 신라군은 공세로 나왔다. 그러나 질적 측면에서 월등히 앞선 반군은 역습을 가해 정부군을 궤멸시켰다. 저항력을 상실한 서라벌은 함락됐고 민애왕은 별궁에 숨었다가 군사들에게 들켜 살해됐다.

버림받은 해상왕, 좌절된 청해진의 꿈

장보고 군의 승리와 신라군의 허무한 패망에서 경직되고 집단 이기주의에 빠진 조직은 이런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교훈은 너무 뻔하고 평범하다. 이 사건 뒤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 숨어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농본사회였다. 그래서 관습과 안정을 중시하고 변화를 꺼려했다. 그렇게 폐쇄적인 신분제가 수백 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창의력과 도전정신, 다양한 인재의 필요성을 체감할 수 있는 환경이 결여됐던 탓이다. 그런데 장보고는 이런 사회에 한중일을 잇는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복잡한 삼각무역을 경영했다. 개방과 인재등용의 중요성을 말과 이론으로 설득하는 게 아니라 보고 체감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무역을 통해 창출하는 부는 농업의 산출량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사회는 청해진의 성과를 보면서도 구체제에 대한 반성과 변화를 거부했다.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청해진의 힘, 새 체제의 역량을 직접 이용했던 사람들도 변화를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김우징은 신무왕이 됐고 장보고의 딸과 혼인약속을 했던 태자는 문성왕이 됐다. 그러나 문성왕은 즉위 후 장보고와의 약속을 파기했다. 장보고가 분노하자 846년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매수해 그를 암살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청해진은 물론 청해진과 산둥반도를 거점으로 행해지던 무역사업이 폐지됐고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되돌아갔다. 이 내전 중에 명확하게 분출된 신분제와 지역차별에 대한 백성의 불만과 터져 나오는 그들의 힘을 보고도 신라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국 50년이 지나지 않아 신라는 왕족들의 내전이 아닌 국민의 반란에 직면했고 결국 멸망하게 된다.

장보고는 평생 두 개의 전쟁을 치렀다. 사회의 질곡을 뚫고 개인의 운명을 바꾸는 전쟁과 사회와 국가를 바꾸기 위한 전쟁이다. 하나의 전쟁에서는 멋지게 성공했다. 두 번째 전쟁에서도 그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과를 냈다. 하지만 집권층은 이를 외면했다. 아무리 뻔한 교훈이라도 실천, 특히 자기 변화, 전통과 관습의 극복은 이렇게 힘들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는 사람은 그만큼 값지고 정말 소수에게만 허용되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게 아닐까?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email protected]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