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이스트먼은 자신이 만든 첫 카메라에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그는 철자가 잘못 쓰이거나 발음이 잘못될 염려가 없으면서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이름을 고민하다가 어머니 성의 첫 글자인 K를 두 번 넣어 강력한 이름을 만들어냈다. 1888년 ‘코닥(Kodak)’이라는 상표는 이렇게 태어났다.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다합니다(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는 유명한 슬로건과 함께였다.
이후 코닥은 사진의 대명사가 됐다. 1989년 투명 롤 필름을 만들었고 1900년 ‘브라우니’라는 1달러짜리 카메라를 내놓았다. 그 안에 들어가는 필름은 15센트였다. 브라우니는 1940년대까지 자그마치 2500만 대가 팔렸다. 코닥은 1935년 처음으로 컬러 필름 ‘코다크롬(Kodachrome)’을 내놓았으며 1969년 인류가 달에 착륙한 장면을 찍은 것도 코닥 카메라였다. 1976년 코닥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필름은 90%, 카메라는 85%에 이르렀다. 1990년대까지 코닥은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5대 브랜드에 들었다.
그런 코닥이 1월19일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 금융회사 리먼브러더스(Lehman Brothers)와 자동차기업 사브(Saab)에 이어 ‘망할 것 같지 않았는데 망한’ 기업에 합류한 것이다. 코닥은 이 중에서도 가장 의외의 기업이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소중한 순간을 ‘코닥 모멘트(Kodak Moment)’라고 표현할 정도로 코닥은 전 세계인에게 단순한 상품이 아닌 추억을 파는 기업이었고 거의 모든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대중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그 잘나가던 코닥에 무슨 일이 생긴걸까.
코닥이 파산에 이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디지털 시대에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2위 대형 서점인 보더스(Borders)가 아마존(Amazon)에 밀려 파산하고 비디오와 DVD 대여점인 블록버스터(Blockbuster)가 온라인 기반의 넷플릭스(Netflix)에 밀려 쇠락한 것처럼 코닥도 캐논(Canon)과 니콘(Nikon), 소니(Sony)에 밀린 것이다. 물론 소니도 워크맨과 디스크맨에 치중하다가 애플(Apple) 아이팟에 MP3플레이어 시장을 내주기는 했다.
그러나 코닥의 몰락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에 위기감을 느낀 코닥도 기업을 살리기 위해 1990년대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90년대 초 구조조정을 단행하며 디지털 이미지 그룹으로 사업 구조를 조정하는 데 성공한 경험도 있다. 1995년 코닥의 기업가치는 133억 달러로 코카콜라(Coca Cola), 맥도날드(McDonald’s), IBM에 이어 세계 4위까지 올랐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휴대전화에까지 카메라가 일반화되면서 코닥은 디지털의 세계에서 계속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다.
디지털 카메라가 와해적 기술?
1975년 코닥 연구소에서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가 개발됐다. 이 디지털카메라는 토스터만큼이나 컸고 사진 해상도는 약 10만 화소에 지나지 않았다. 사진을 기록하는 데는 23초가 걸렸다. 코닥의 연구원이었던 스티브 사손(Steve Sasson)이 개발한 이 신기술은 연구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하지만 코닥 임원진의 반응은 싸늘했다. “좋기는 한데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마세요(That’s cute- but don’t tell anyone about it).” 개발 초기 단계였던 디지털카메라 기술은 당시의 아날로그 사진 기술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무엇보다도 필름이 필요 없는 카메라였기 때문이다. 필름으로 돈을 버는 코닥에 디지털카메라는 회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기술이었던 셈이다.
그 뒤로도 코닥은 디지털카메라를 시장에 선보일 기회를 2번 더 놓쳤다. 1981년 소니가 처음으로 디지털카메라(Mavica)를 발표하자 코닥은 디지털 사진 기술이 가져올 위협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고 계속 필름 사업에 치중했다. 당시로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었다. 필름, 화학품, 인화 사업은 이윤이 60%에 이른 반면 디지털 관련 사업은 이윤이 15%에 지나지 않았다. 디지털 사업에서는 필름과 사진 인쇄로 창출되는 지속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코닥은 1992년에도 다른 업체들보다 한발 앞서 소비자용 디지털카메라를 출시할 수 있었지만 주력인 필름시장이 잠식 당할까봐 주저하다가 결국 다른 기업이 디지털카메라를 내놓기 시작한 1994년에서야 부랴부랴 출시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디지털카메라가 확산되면서 시작된 진검승부에서 코닥은 맥을 추지 못했다. 뒤늦게 디지털 시장에 진출하는 바람에 일찍부터 디지털 시장을 대비한 캐논과 니콘 등에 밀렸다. 코닥의 디지털카메라는 예쁘고 깜찍한 캐논과 니콘 제품에 비해 디자인이 투박했고 적목 현상 없애기, 얼굴 인식 등 일본 기업의 디지털카메라에는 있는 다양한 기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코닥은 결국 구식 필름 카메라 만드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바꾸지 못했다. 1991년 190억 달러에 이르던 매출은 2010년 72억 달러로 추락했고 1990년대 후반∼2000년대 후반 10년 동안 코닥의 주식 가치는 75%나 떨어졌다.
코닥은 하버드 경영대학원 클레이트 크리스텐슨 교수가 저서 <혁신가의 딜레마(Innovator’s Dilemma)>에서 지적한 대로 선도 기업이 후발 기업에 밀려 시장지배력을 상실한 전형적인 케이스다. 코닥은 그들이 잘 만들고 대다수의 소비자가 사용하고 있는 필름을 더 잘 만드는 데 집착했다. 존속성 기술(Sustaining Technology)에 의지한 것이다. 디지털카메라 기술이 기존 고객이 요구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전혀 다른 기능을 요구하는 새로운 고객이 원하는 와해성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잘나가는 기업일수록 지속성 기술에 집착하고 와해성 기술을 폄하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창업자인 이스트먼이 와해성 기술을 인식하는 데 귀재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이스트먼은 필름 기술의 수준이 낮았던 1800년대에 초기 기술이었던 ‘드라이 플레이트’에서 필름으로 재빨리 옮겨왔고 흑백 필름이 대세였을 때 아직 개발 초기단계였던 컬러 필름에 투자해 성공했기 때문이다.
코닥의 몰락이 더 뼈아픈 이유는 디지털카메라 기술을 내부적으로 개발해 놓고도 이를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일류 기업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고객의 요구에 따르고 고객이 원하는 대로 상품을 개선해 대량으로 제공할 수 있는 기술에 투자하고 시장 경향을 분석해 수익을 가져다주는 혁신에 투자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코닥의 창립자 이스트먼은 창립 초기 경영 원칙을 세웠는데 △저가의 대량 생산 △국제 유통 △광범위한 광고 △고객 중심 △지속적인 연구를 통한 성장 및 개발 촉진 △직원들을 존중하는 마음과 공평한 대우 △사업 확장을 위한 수익 재투자였다. 크리스텐슨의 설명과 당시에는 첨단 경영 방식이었을 이스트먼의 원칙이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