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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신라귀족 김헌창의 좌절: 온실속 화초는 잡초에 진다

임용한 | 105호 (2012년 5월 Issue 2)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신라의 역사는 흔히 상대, 중대, 하대로 분류된다. 건국해서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소위 신라의 극적인 성장기가 상대, 통일 후 행복하게 살았던 시대가 중대, 신라가 쇠망기로 접어드는 때가 하대다.

 

말기 증후군에 빠진 신라

하대의 시작은 혜공왕(765∼780)부터로 잡는다. 그 시작은 도를 넘은 권력투쟁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권력이 있는 곳에는 권력투쟁이 있다. 한때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우리는 조선시대의 당쟁을 무척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형태만 다르지 정파와 권력투쟁이 없는 나라는 없다. 정치의 타락을 판별하는 기준은 정쟁의 치열함이 아니라 정쟁의 비상식적 태도다. 조선을 예로 들면 조선 전기까지는 정파가 대립해도 국가운영과 제도를 두고는 최선을 추구하는 이성적인 대립을 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제도와 국가의 운명까지도 정쟁 자체에 종속돼 정쟁의 도구가 된다. 이것도 우리 역사에만 있는 현상은 아니다. 망한 왕조, 몰락하는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전형적 현상이다.

 

신라도 이 길을 걸었다. 비상식적 대립의 시작은 내전이었다. 768 7 96각간(角干)의 난이 터졌다. 각간은 당시 신라 최고의 품계로 신라 왕족 중에서 최고위층 인사들을 지칭한다. 통일 후 이들은 전국의 주요 도시로 확산돼 살고 있었는데 수도 서라벌에서 각간 대공과 동생 아찬 대렴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33일간 포위하자 전국의 신라 왕족들도 두 패로 나뉘어 전투를 벌였다.

 

이 난의 원인과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혜공왕은 왕궁을 포위한 반군을 진압하고 왕좌를 지켰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신라 왕족의 단합과 내란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이후로 신라는 긴 권력투쟁에 빠져들었고 쿠데타와 내전이 빈발했다. 혜공왕은 768년의 위기는 무사히 넘겼지만 780년 끝내 다시 궁궐이 점령당하는 쿠데타를 허용하고 반란군에게 살해됐다.

 

국가와 지배층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신라의 정치와 신라 왕족으로 제한되는 좁은 권력구조 및 폐쇄적인 신분제, 비효율적인 국가운영방식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치솟았다. 그러나 신라의 지배층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전혀 쇄신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완전히 멸망하기까지 170년이란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한반도가 고립된 지역이고 주변국의 침공이나 위협이 없었던 덕택이다.

 

김헌창의 난

신라 하대에 발생한 많은 쿠데타 중에서 제일 규모도 크고 극적이었던 사건이 김헌창의 난(822)이다. 김헌창은 신라 정계의 최고 실력자였다. 선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다음 왕으로 김헌창의 부친 김주원이 내정됐다. 그러나 집터를 잘못 골랐는지 그의 집이 알천 북쪽에 있었다. 바로 궁으로 와서 즉위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마침 내린 비로 알천이 범람해 하천을 건너지 못했다. 그러자 왕좌를 오래 비워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김주원의 이복형제 또는 사촌으로 추정되는 김경신이 원성왕(38대 왕)으로 즉위해 버렸다. 두 세력이 혈연적으로 너무 가깝고 세력 균형이 팽팽했기 때문에 알천 범람 같은 사소한 사건이 왕위를 갈랐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원성왕은 이 위험한 라이벌을 제거할 수도 없었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그 후로도 신라 정계의 일인자로 살았다. 그 사이에 기회가 왔다. 원성왕의 후손들이 또다시 분열했기 때문이다. 원성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김인겸이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맏손자 김준옹이 소성왕(39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도 일찍 죽어서 다시 소성왕의 아들 애장왕(40대 왕) 13살로 즉위했다. 이후 소성왕의 바로 아래 동생인 김언승(김인겸의 둘째 아들)은 조카인 애장왕을 대신해 섭정을 하다 수양대군처럼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41대 헌덕왕)에 오른다. 하지만 헌덕왕은 재위 기간 내내 두 동생(김인겸의 셋째, 넷째 아들)들로부터 끊임없이 왕권 위협을 받아왔다. 그의 작은 아버지(원성왕의 둘째, 셋째 아들) 후손들의 야심도 만만치 않았다.

 

김헌창은 이처럼 원성왕계 후손들의 분열과 복잡한 권력구조 덕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들의 입장에서 보면 껄끄럽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는 지금의 국무총리 격인 시중을 지냈지만 시중으로 재임한 기간은 짧았고 주로 지방의 총독인 도독을 맡았다. 헌덕왕 때 그는 무진주(지금의 광주), 청주(진주), 웅천주(공주) 도독을 차례로 역임했다. 지방으로 내보내도 한곳에 오래 두면 자기 세력을 양성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자주 재임지가 바뀌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방식이 역효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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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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