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검은 나폴레옹’, 사카 줄루
인류 역사를 보면 역사의 발전과 통합의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정복전쟁이 발발한다. 아프리카의 영웅이자 줄루 제국을 건설한 사카 줄루(Shaka Zulu)는 아프리카에 처음으로 진정한 군대와 전술을 도입했다. ‘검은 나폴레옹’으로도 불리는 그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사카 줄루는 아프리카에 처음으로 진정한 군대와 전술을 도입했다. 그는 전사들을 빠르고 강하게 단련시켰다. 그리고 단순히 적을 위협하고 몰아내는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살육할 수 있도록 훈련했다. 이를 위해 그는 두 가지를 개량했다. 의장용에 가깝고 멀리서 던지기만 하던 전사들의 창과 방패를 짧고 가볍게 만들어 찌르기용으로 개량했다. 더 무서운 변화는 집단 전술이었다. 임피라고 불린 연대를 단위로 사카는 ‘황소의 뿔’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창안했다.
우선 병력을 좌군, 중군, 우군의 삼대로 나눈다. 적과 마주하면 중군이 일자형 횡대로 적과 부딪힌다. 이것이 황소의 가슴이다. 개인적으로는 황소의 머리라고 했으면 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 같은데 줄루인에겐 머리보다는 가슴이 더 단단하고 굳건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아니면 이 중앙부 연대에는 머리보다 가슴이 필요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일단 팽팽하고 격렬한 육박전을 견뎌내야 한다. 그들이 좀 강하고 훈련이 잘돼 있다고 해도 이런 정면 대결은 피차 간에 비슷한 희생을 요구한다. 아니 공격 측이 좀 더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병력도 결코 우세하지 않았다. 진짜 주력은 좌·우군이다.
좌군과 우군은 황소의 뿔처럼 좌우로 빠르게 우회해서 적의 측면을 친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들은 영화에서처럼 마구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지 않고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초원의 풀과 지형을 이용해 소리 없이 접근해서 습격했을 것이다. 수천 년 늦게 등장하기는 했지만 전술적 완성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직하게 정면충돌을 고수했던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 전술보다도 나았다. 고대 중국에서는 이런 전술을 사용했지만 그들은 이 기동을 전차병과 기병에게 맡겼다. 하지만 맨발의 아프리카 전사들은 날랜 발과 동물적인 야성으로 우회기동과 습격을 소화해 냈다.
이산들와나의 격전
1879년 1월11일 식민지 획득에 열중했던 영국이 줄루족을 침공했다. 병력은 영국군 5700여 명에 아프리카에서 징집한 병사 8000명이었다. 남아프리카를 정복하기에는 너무 적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원래 초기 식민지 정복전에서 서구 제국의 군대 규모는 놀랄 만큼 작았다. 그들이 동양인, 아프리카인을 얕봐서가 아니라 아시아나 아프리카로 충분한 병력을 파견할 재정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지에서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그들은 점점 자신감을 갖게 됐고 모험적인 원정도 감행하게 됐다.
영국군은 부대를 3개 대열로 나눴다. 당시 영국군을 이끌었던 쳄스포드(Chemsford) 장군은 그중 1개 대열인 약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줄루의 수도인 울룬디(Ulundi)로 진격했다. 줄루의 왕 케츠와요(Cetshwayo)는 결전을 각오하고 4만의 병력을 소집했다.
진격하던 쳄스포드 부대는 이산들와나(Isandlwana) 평원에 캠프를 차렸다. 이곳은 서부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바위지형인 뷰트(butte·규모가 작은 비석 모양의 암석 구릉)나 메사(mesa·거대한 성채처럼 규모가 큰 암석구릉) 같은 바윗덩어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캠프를 치기에는 적절한 장소처럼 보였다. 물이 있었고 주변의 시야도 좋았다. 뒤에 바위산이 있어서 포위당할 위험도 적었다.
그러나 텐트 주변을 정찰해 보니 이곳은 위험한 지형이었다. 곳곳에 구릉과 땅이 갈라진 계곡이 있어 적의 이동을 가려주고 있었다. 쳄스포드는 즉시 정찰 기병대를 내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정찰대는 20㎞ 전방 계곡에서 줄루족을 발견했다. 새벽에 쳄스포드는 부대 절반을 인솔하고 출동했다. 그러나 이 사이에 줄루족은 쳄스포드를 지나쳐 캠프를 포위했다. 이 공격에 동원된 줄루족은 2만5000명이었다.
캠프에는 2개 부대가 있었다. 헨리 풀레인(Henry Pulleine) 중령이 지휘하는 쳄스포드 부대의 잔여 병력과 지원부대로 막 도착한 앤서니 던포드(Anthony Durnford) 대령의 기병대였다. 풀레인은 야전지휘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행정장교였다.
‘황소의 뿔’ 앞에 무너지다
지형에 대한 불안, 예상치 못한 적의 출현으로 초조해 하던 그들은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 던포드는 기병대를 이끌고 혹시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줄루족을 소탕하기 위한 위력정찰(일부러 적을 위협해 적으로 하여금 출동하거나 사격하게 함으로써 그 역량이나 배치상태를 알아내는 일)을 시행했다. 풀레인은 풀레인대로 줄루족을 찾기 위해 부대를 전진시켰고 좌측면 고지로 중대를 나눠 보냈다. 보급품을 집적한 후위부대는 방어선을 강화하고 철벽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기본을 어겼다. 암벽 지형이라 참호를 파기가 쉽지 않았지만 마차로 원형진지를 구축할 수도 있었는데 그것도 하지 않고 부대가 전진했다.
줄루족 본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라도 풀레인이 즉시 캠프로 후퇴해서 방진을 펼쳤더라면 전황이 달라졌을 수 있었다. 그러나 풀레인은 좌측 분견대(分遣隊)와 우측 던포드 부대 사이가 비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제자리에서 황소의 가슴과 맞서 일자대형을 펼쳤다. 영국군은 황소의 뿔 전술을 알고 있었지만 지형 탓에 좌우로 우회한 줄루족을 보지 못했다. 뿔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던포드의 부대는 왼쪽 뿔과 마주쳤다. 그들은 사격을 가하며 캠프로 천천히 후퇴했다. 그 사이 줄루 전사들은 던포드와 풀레인 부대 사이의 빈 공간을 발견했고 이 틈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풀레인과 던포드가 캠프로 돌아오기 전에 줄루족이 캠프로 침입해 학살했다. 그동안 황소의 오른쪽 뿔은 풀레인의 분견대를 전멸시키고 풀레인을 포위했다. 그래도 사격을 가하는 동안은 줄루족을 저지할 수 있었지만 캠프와 분리된 탓에 탄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영국군의 마르티니 헨리 소총은 최신의 후장식 단발소총으로 1분에 10∼12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정면으로 달려드는 줄루족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활지에서 측면과 후면까지 감당하기는 무리였고 용기를 얻은 줄루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점점 거세게 달려들었다. 약 1700명의 영국군이 살해당했다. 생존자는 55명에 불과했다.
창으로 총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이산들와나 전투는 창으로 총을 이긴 전투로 전쟁사에 길이 회자된다. 대체로 동양인과 영화제작자들은 영국군의 패인으로 서구인의 오만, 현대 무기에 대한 과신, 고대 전술의 신비로움을 지적하곤 한다. 영국의 전사가들은 탄약 상자를 열 스크루 드라이버가 대대당 1개뿐이어서 총알 공급이 제때 되지 않았다는 구실을 찾아냈다. 상자에 십자 나사가 박혀 있었는데 하필 드라이버도 일자 드라이버였다던가?
이런 해석들은 다 문제가 있다. 특히 탄약상자를 열 공구가 부족해서 전쟁에서 졌다는 설명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탄약상자는 급하면 개머리판으로 쳐서 열 수도 있다. 곧 죽어도 드라이버로만 열려고 했다면 그 고지식함이 더 큰 문제였다고 봐야 한다. 또, 황소의 뿔은 원초적 전술로서 현대전에도 변함없이 적용되는 원리이긴 하지만 기초 중의 기초로 신비로운 수준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이 최신무기를 과잉 신뢰했다고 해도 단발소총으로 2만의 적을 사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영국국이 자신감을 가졌던 이유에는 두 가지가 더 있다. 원주민의 비조직성과 분열, 그리고 영국군의 우월한 전술능력이다. 창과 방패로 무장했다고 해도 2만이 넘는 적은 분명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영국군이 월등한 기동력과 전술능력으로 적을 먼저 발견하고 선제공격을 가해 적을 흩어버리면 적은 쉽게 와해된다. 부족 단위로 움직이는 군대는 주요 부족을 각개격파하면 바로 소멸되기 때문이다. 쳄스포드가 병력 절반을 이끌고 캠프를 떠난 것도, 풀레인과 던포드가 캠프를 사수하지 않고 밖으로 나간 이유도 선제 타격을 통해 단발소총의 화망이 감당할 수 없는 대부대의 결집과 인해전술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영국군 패전의 근본적 요인은 쳄스포드를 포함한 그 누구도 줄루가 그런 대병력을 전술적으로 통제하고 운용할 수 있으리라고 전혀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자극, 동일한 역경에 대해 민족마다 혹은 집단마다 대응하는 태도와 방식은 확실히 다르다. 토인비도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고 정의하며 민족의 역량에 따라 응전능력 역시 다르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대응 방식이 절대로 변치 않을 것이라고 속단하는 건 위험하다.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에 진출한 기업들 중에는 간혹 개도국의 초기 상태를 보고 그 민족, 문화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거나 그들의 고유한 특성에 대해 섣불리 단정 짓는 기업들이 있다. 하지만 줄루족의 경우처럼 인간은 자극과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 투자와 시장관리, 인사관리를 포함한 모든 경영계획에서 변화의 잠재적 가능성과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예측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email protected]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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