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anitas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기원전 334년 페르시아군은 지중해 연안의 이수스(Issus)에서 마케도니아의 젊은 사자 알렉산더에게 참패를 당하고 소아시아 일대를 상실했다. 하지만 페르시아제국은 아직 넓었고 마케도니아 그리스 연합군은 소아시아와 이집트 일대의 반군과 항복을 거부하는 도시를 평정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었다. 장기간의 원정에 의한 피로와 보급에 곤란을 겪고 있다는 소문도 들어왔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곤경 속에서도 페니키아와 레바논, 지금의 이스라엘 일대를 평정하고 이집트까지 굴복시켰다. 그리고 지구 끝까지 다리우스를 추격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었다. 여기에 이수스 전투에서 다리우스의 모친과 왕비와 딸이 알렉산더에게 포로로 잡혔다. 모욕감과 알렉산더의 성장세에 불안감을 참을 수 없었던 다리우스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 알렉산더에게 도전한다.
알렉산더와 다리우스의 최후의 결전
기원전 331년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3세는 전국에 명령을 내려 동원 가능한 최대한의 병력을 모았다. 중앙아시아, 박트리아, 심지어 인도에서까지 군대가 모였다. 병력이 무려 100만이라는 설이 있는데 근대의 학자들은 이 수치에 당연히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아무튼 알렉산더의 4만7000명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던 건 분명하다.
다리우스가 결전장으로 채택한 곳은 메소포타미아였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놓인 이곳은 유서 깊은 고대문명의 발상지이자 중동 지배의 중심지였다. 훗날 사라센제국의 수도이자 오늘날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도 이 지역에 있다. 하지만 다리우스는 두 강을 건너 바그다드 지역으로 서진하는 것은 두려워했다. 지금의 페르시아의 중심부이자 현재 이란 지역인 동쪽으로의 퇴로가 완전히 막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리우스는 두 강 중 동쪽에 있는 티그리스강의 동안에 머물며 자기 대신 알렉산더가 강을 건너와 주기를 기대했다. 티그리스강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다리우스는 동안에 위치한 아르벨라(Arbela)를 전진기기로 삼아 군수물자를 잔뜩 비축한 뒤 북쪽으로 100㎞ 지점에 있는 가우가멜라(Gaugamela)로 진군했다.
가우가멜라는 지금도 작은 마을밖에 없는 황량한 평원지대다. 다리우스가 이곳을 택한 이유는 페르시아군의 장점인 기병과 전차대를 운용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다리우스는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병을 방해하는 튀어나온 지형을 깎아서 없애버리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짧은 시간 동안 지형을 개조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인데 페르시아군이 그만큼 지형을 숙지하고 철저히 대비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전투 위치를 정하고 기병의 활동범위와 기동로에 대한 세밀한 측정까지 마쳤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범주 안에서 방해가 되는 지형지물까지 정리했다.
알렉산더의 무모한 도전
다리우스가 가우가멜라에서 토목공사까지 벌였다는 것은 알렉산더가 이곳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는 의미다. 알렉산더는 냉철하고 뛰어난 전술가였지만 격분해서 친구를 살해하고 페르시아의 궁전을 모두 불살라버릴 정도로 무모하고 충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과음으로 술에 취해 그랬다는 설도 있지만 술만으로는 이 이상한 이중성을 설명하기 힘들다. 술에 취하지 않았던 냉철한 전략가 모드에서도 알렉산더는 종종 무모한 작전을 감행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우가멜라 전투다. 그는 다리우스의 바람대로 2개의 강을 건너 다리우스가 기다리는 죽음의 평원으로 서슴지 않고 들어섰다.
알렉산더가 전투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보급곤란으로 그는 장기전을 할 수 없었다. 무조건 빨리 다리우스를 격파하는 게 최선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가우가멜라 전투는 보통의 지휘관으로서는 도저히 내릴 수 없는 결단이었다.
알렉산더의 병력은 이수스 전투 때의 3만 명보다는 많았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군대도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손실과 현지 보충으로 인해 차츰 혼성군대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것은 알렉산더군의 장점인 ‘비록 소수라고 해도 단일한 원칙에 의해 강하게 훈련된 정예 부대’라는 특성이 조금씩 희석돼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마케도니아 그리스 연합군의 핵심전력인 장창부대는 특별하게 강인한 체력과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는 고강도 훈련이 필요한 부대여서 단기간에 보충하거나 육성하는 게 불가능했다.
무엇보다도 보병과 장창 중심인 그리스군의 전술은 그리스의 산악과 좁은 평원에서 개발되고 특화된 전술이었다. 아시아의 평원은 기병의 땅이었다. 더욱이 가우가멜라 평원은 그냥 평원이 아니라 페르시아군이 세팅까지 마친 준비된 적진이었다.
만에 하나 그리스군이 패배한다면 평원은 완벽한 죽음의 함정이 된다. 평원에서는 보병이 기병을 피해서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다. 게다가 도주 방향에는 2개의 강이 가로막고 있다. 이중의 배수진인 셈이다.
반대로 알렉산더가 승리한다고 해도 페르시아군은 동쪽으로의 도주로가 확고하게 열려 있었다. 알렉산더의 바람대로 다리우스를 잡고 한번에 전투를 끝내려면 특별한 기회와 작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곳 지형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중으로 위험하고, 이중으로 힘들고, 성공해도 성과를 거두기 힘든 곳이었다. 그렇다고 알렉산더에게 삼국지의 제갈공명처럼 사전에 준비된 계략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의 계획은 현지의 사정에 맞춰 대응한다는 것뿐이었다.
회피와 돌파
페르시아군은 길고 견고한 이중의 횡대를 편성했다. 양 끝에는 그들이 기대하는 기병대가 포진했다. 3군으로 구성된 페르시아군은 전형적인 전투방식대로 우익이 나가 그리스군의 좌익을 치고 좌익은 그리스군 우익의 공격에 대비했다.
페르시아군 공격의 첨병은 기병이었다. 그들의 전술은 기병의 기동력을 이용해서 그리스군의 보병대형(팔랑크스)의 측면이나 후면을 습격하는 것이었다. 기왕이면 기병이 팔랑크스가 갈라진 틈으로 파고들 수 있다면 승리는 맡아놓은 당상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두 가지 시도를 했다. 첫째는 비밀무기인 전차였다. 바퀴와 함께 회전하는 삼중톱날을 달고 전차측벽에는 낫을 달았다. 전차는 스치는 모든 것을 갈아 없애 버리는 무서운 무기가 됐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간단하게 전차를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전차의 뒤를 따라오면서 전차병을 공격했다. 전차는 회전반경이 지나치게 커서 방향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페르시아 전차단은 계속 앞으로 달려 전장을 영원히 벗어났다.
페르시아군의 두 번째 시도는 기병으로 팔랑크스 간의 간격, 이동 중에 생기는 간격을 파고 들어가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전술은 과거 그리스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번 성공한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팔랑크스는 교묘한 개량형이었다. 알렉산더는 팔랑크스 본대 옆에 마치 위성처럼 기병과 보병 각각 2개 분대로 구성된 4개의 분대를 뒀다. 작고 빠른 이 분대는 본대의 좌우로 전개해서 측면을 보호하거나 본대가 돌파당하면 바로 돌파구 주변을 감싸 돌파구를 봉쇄했다. 폭격기를 호위하는 전투기 편대를 연상하면 된다.
이 효과적인 전술로 그리스군은 기병의 땅에서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강하게 오랫동안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알렉산더가 직접 지휘하는 우익이 승리할 때까지 버티는 것뿐이었다.
우익에서 알렉산더는 기병을 이끌고 적진을 돌파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스군은 전통적으로 기병이 약했다. 하지만 제국을 점령하기 위해 알렉산더는 강력한 기병을 양성했다. 다만 이들은 페르시아의 기병에 비하면 병력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페르시아군의 전열을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알렉산더가 접근해 오자 페르시아 기병도 응전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페르시아 기병은 수는 많았지만 여러 민족의 혼성부대여서 손발이 맞지 않았다. 게다가 기병은 빠르고 활동범위가 넓어서 통제하고 손발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이것은 기병전에 있어서 병력의 우위라는 장점을 살리는 게 보병보다도 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페르시아 기병은 여러 개의 독립부대로 분리됐다. 알렉산더의 보병은 7000명 정도였는데 7000∼1만 정도가 통제 가능한 기병 병력의 최대치였다. 알렉산더는 이 약점을 간파했다. 박트리아나 인도 기병대는 장비도 부실해서 갑옷도 제대로 장만하지 못했다. 그들은 정면공격을 피하고 그리스군의 후위로 돌아가거나 보급부대를 공격했다. 알렉산더는 이 저급한 기병부대의 공세에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에 집중했다.
마침내 페르시아 주력 기병대가 출격했다. 이들도 알렉산더의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측면공격을 위해 크게 우회했다.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기병은 세계에서 제일 빠른 말을 보유하고 있었다. 속도를 이용한 우회기동과 측·후방 기습은 그들의 장점이자 장기였다. 전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이 측면이나 후방을 공격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군대는 이런 순간을 맞이하면 당황하고 말머리를 돌리려고 하다가 엉클어지고 자멸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알렉산더의 심장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는 이들조차 무시한 채 이 부대가 빠져 나오는 바람에 발생한 페르시아군 진형의 거대한 구멍에 주목했다. 그는 전속력으로 그 구멍을 향해 돌진했고 그 균열을 넓혀 그대로 다리우스가 있는 중앙으로 쇄도했다. 이 일격으로 다리우스의 중군이 붕괴했고 페르시아제국은 회복 불능의 치명타를 입었다.
무모한 용기와 감각경영
전투에서 전술적으로 적을 압도하고 쾌감을 주는 승리를 거두려면 적의 약점을 공략하고 적의 실수를 유도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장점을 살리고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공간에서 싸워야 한다. 다리우스는 이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하지만 다리우스가 파악한 그리스군의 단점은 원론적인 것이었고 현장감이 누락돼 있었다. 또한 페르시아군의 전형적인 단점, 여러 민족의 혼성편제와 훈련부족, 팀워크의 부족이라는 단점에 대해서는 오직 이전 전투인 이수스 전투에서 경험한 것에만 매달렸을 뿐 새로운 전투에서 그것이 어떻게 발현될 것인지에 대한 판단과 준비가 없었다.
알렉산더는 모래알 같은 조직력을 가진 군대는 어떻게 격파해야 하는가라는 식의 교과서적인 구상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적이 이런저런 약점이 있다는 명제가 아니라 그 약점이 구현되는 현장에 주목했다. 물론 알렉산더도 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예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열되고 훈련이 부족한 군대는 대담하고 빠르게 기동하는 부대에게 반드시 약점을 노출하게 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자신의 전투감각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분들이 이성을 뛰어넘는 용기, 전투감각에 대한 예찬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위험한 오류다. 흔히 말하는 감각적 대응, 감각적 판단은 결코 이성과 데이터를 배제하는 영역이 아니다. 평범한 지휘관은 데이터에 의존하고 불확실한 부분은 생각하기조차도 꺼려한다. 반면 용기 있는 지휘관은 데이터를 장착하고 현장과 미래라는 불확실성의 영역에 뛰어든다.
프로야구의 김성근 감독이 과거 데이터 야구를 내세웠을 때 많은 사람들이 데이터를 기계적으로 적용, 반복하는 야구로 오해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결코 ‘야신(야구의 신)’이 될 수 없다. 야신의 감각은 데이터를 연소해 창조에 도전하는 용기로 구현된다. 그것이 진정한 감각경영이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email protected]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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