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개 1년 열두 달로 이뤄진 달력의 통제를 받는다. 본디 달력이란 인간이 무한한 시간을 일정한 패턴 속에 넣어 체계화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어느 새 인간은 시간에 대한 주체성을 상실한 채 스스로 만들어 낸 달력의 기계적 패턴에 함몰돼 숫자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 모습이다. 2013년 새해를 맞아 희망과 꿈에 부풀어하기보다 나이 한 살 더 먹었다며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의 흐름에 당황하는 이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정말로 인간은 시간의 지배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이 질문과 관련해 생각해볼 만한 사례가 있다. 20세기 영국의 저명한 사회인류학자인 에드워드. E. 에번스-프리처드 경(卿)의 역저 <누에르족>에 드러난 시간관이다.
누에르족은 남부 수단에 거주하는 나일 제족(諸族)의 하나다. 에번스-프리처드 경에 따르면 누에르족은 시간의 흐름을 자연의 변화가 아닌 인간의 활동을 기준으로 이해한다. 소를 사육하는 목축민인 누에르족은 1년 중 우기 때 높은 언덕에 세운 마을에서 잡곡을 경작하며 보내고 건기에는 물과 목초를 찾아 나일강가에서 야영 생활을 한다. 이에 따라 ‘소를 몰고 가는 시간’ ‘젖 짜는 시간’ 등 목축과 관련한 일련의 작업과 작업 간 관계에 따라 특정 시각과 시간의 경과를 표현한다. 시간의 가치도 1년 내내 동일하지 않다. 분주한 건기와 한가한 우기의 목축 업무는 같은 작업이라도 소요되는 시간이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1시간이라도 가치가 다르다. 시간의 절대 양보다는 상대적 질을 중시하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누에르족에게 계절이란 시간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사회·경제적 활동 그 자체이며 1년이라는 ‘생태적 시간(ecological time)’은 자연의 변화가 아니라 마을(우기)과 야영지(건기)를 오가는 인간의 왕복 활동이다.
1년이라는 사정거리를 넘어서는 시간은 ‘구조적 시간(structural time)’으로 인식된다. 구조적 시간을 표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집단 전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들을 기준으로 삼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송아지가 출생한 뒤에” “마을이 습격을 당하기 전에” “홍수가 난 바로 뒤에” 등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주목할 점은 각 부락마다 겪는 여러 가지 사건과 경험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같은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각각의 시간이 구조적 공간에 따라 달라지며 지역적으로 별개로 사고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누에르족에게 시간은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정해져 있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의 활동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시간을 규정하고 해석하는 누에르족은 마치 시간의 지배자 같은 모습이다. 자연의 변화에 의해 시간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 활동을 중심으로 시간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물론 부족사회에서나 가능할 법한 시간관을 고도로 발달된 21세기 문명사회에 그대로 옮겨올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을 불가역적 객체가 아니라 인간 활동 안에서 주관적으로 재해석하는 관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의 학술 저널리스트 슈테판 클라인의 명저 <시간의 놀라운 발견>에서도 지적됐듯이 기억 속에서 시간의 길이는 정보의 양에 비례한다. 즉, 뇌로 흡수되는 정보가 많으면 시간을 길게 느끼지만 별로 기억에 남는 것 없이 지내면 그만큼 짧게 느낀다고 한다. 새로운 것을 많이 경험할수록 나중에 기억되는 시간의 길이는 그만큼 길어진다. 모든 게 새롭기만 한 어린 시절에는 흡수해야 할 정보가 너무 많아 시간이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지만 나이를 먹어 아는 게 많아질수록 세월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똑같은 이치다. 이를 바꿔 말하면, 나이가 들어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놓지 않고 새로운 일을 가능한 많이 경험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시간을 길게 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과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변화무쌍한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상황에 끌려 다니지 말고 상황을 주도하며 살아가야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방실 기업가정신센터장 [email protected]
필자는 서울대 영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석사)을 졸업했고 미국 듀크대 경영대학원에서 MBA학위를 받았다.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거쳐 올리버 와이만에서 글로벌화 및 경쟁전략 수립 등과 관련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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