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려준 유리한 조건은 유리한 지리적 조건보다 못하고, 유리한 지리적 조건은 사람들의 인화단결만 하지 못하다(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한국 최고(最古)의 기업 두산그룹의 첫 번째 세대 교체가 이뤄진 건 1936년이었다. 두산그룹 창업자 매헌(梅軒) 박승직(1864∼1950년)은 72세 되던 1936년, 조선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던 아들 연강(蓮崗) 박두병(1910∼1973)을 데려와 ㈜박승직상점에 수습사원으로 채용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상무로 승진시키며 실질적인 경영권을 물려줬다. 연강은 20대의 젊은 나이였지만 공격적으로 박승직상점을 근대화된 기업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두산그룹의 역사를 보면 매헌의 창업 이후 시기를 ‘요람기’로, 연강의 시대를 ‘형성기’로 부를 정도로 두산그룹이 근대적인 기업의 면모를 갖추게 된 건 연강의 지휘 아래서였다.
연강은 직원 30여 명 규모의 박승직상점에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경영제도들을 도입했다. 우선 출근부를 만들어 출근 도장을 찍게 했다. 직원들에게 고객과의 약속 시간도 철저하게 지킬 것을 당부했다. 약속 시간에 10분 정도 늦는 ‘코리안타임’이라는 말이 불과 10년 전까지도 회자됐던 걸 보면 1930년대에 시간 관념이 철저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연강은 신용은 곧 시간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고 보고 직원들의 시간 관념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와 함께 직원들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평가결과에 따라 상여금을 차등 지급해 유능하고 성실한 직원을 우대했다. 또 1명뿐이던 여직원을 5명으로 늘려 여성 노동력을 활용했다. 지금도 호봉제가 일반적이고 여성 인력 활용 방안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한국에서 1930년대에 이러한 제도들을 도입했다는 건 놀라울 정도로 혁신적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직원 건강 증진과 사원 친목 도모를 위해 야구부와 탁구부를 만들어 운동을 했다는 점이다. 연강은 사내 팀과 동대문 포목상들과의 친선 경기를 개최했고 전 직원 야유회를 가며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출근부와 상여금 차등 지급은 ‘관리’적인 요소가 강한 반면 운동 동호회에서는 요즘 유행하고 있는 ‘펀(fun) 경영’의 느낌이 묻어난다. 펀 경영의 원조는 사실 1930년대 박승직상점인 셈이다.
펀 경영은 직원들에게 활력을 주고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 창의력을 이끌어내는 관리방식을 말한다. 직원들은 일상적인 루틴에서 벗어나 친근감과 사회성, 창의력을 개발할 수 있고 기업은 긴장을 해소해 노사분규를 방지하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게리 하멜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관리, 통제는 20세기 방식이며 이로부터 직원을 해방시켜야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지식, 근면, 순종보다는 열정, 창의성, 추진력을 갖춘 조직으로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강이 이미 20세기 초반에 사내 운동 동호회를 만드는 등 펀 경영을 시작하고 새로운 경영기법을 도입한 덕분으로 박승직상점은 1938년 개업 이래 최대의 흑자를 기록했다. 당시 중국 만주 쪽 면직물 수요가 급증한 점도 작용을 했지만 연강은 1938년 박승직상점의 자본금을 6만 원에서 18만 원으로 늘리고 순이익도 4만2000원을 남겼다. 이듬해에는 순이익이 23만7000원에 이를 정도로 실적이 좋았다.
1930년대에 펀 경영에 대한 생각이 정립돼 있을 리가 없지만 연강이 펀 경영과 비슷한 경영 방식을 채용한 것은 그가 인화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비롯됐다고 보여진다. 연강은 <맹자>에 나오는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는 말을 좋아해 자식들에게도 강조했다고 한다. 인화가 제일이라는 철학에서 이러한 획기적인 경영 방식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1982년 국내 프로야구가 시작됐을 때 두산그룹이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구단을 창설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김선우 기자 [email protected]
필자는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 인문지리학을 전공하고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2001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문화부, 경제부, 산업부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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