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으로 해서 아무리 큰 부(富)를 축적했다 할지라도 죽음이 임박한, 하얀 시트에 누운 자의 손에는 한 푼의 돈도 쥐어져 있지 아니하는 법이다.”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1895∼1971년)는 가장 모범적인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다방면에서 존경을 받았지만 가장 빛나는 그의 유산 중 하나는 유언장일 것이다. 1971년 3월11일 사망한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은 사망 약 한 달 후인 4월4일 개봉돼 같은 달 8일 공개됐다.
유언장의 내용을 보면 그가 소유했던 유한양행 주식 14만941주(시가 2억2500만 원)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신탁기금’에 기증하도록 했다. 유일한 박사는 이미 생전에 유한양행 총 주식의 40%를 각종 공익재단에 기증한데 이에 이어 개인 소유 주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기증했던 것이다. ‘이윤의 추구는 기업성장을 위한 필수선행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평소의 생각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유언장에 직계가족 상속에 관한 언급은 3번 나온다. 미국에 있는 장남에게는 “너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는 유언을 남겼다. 재산을 일절 물려주지 않았다. 딸 유재라 여사에게는 오류동 유한중고교 구내이자 그의 묘소가 있는 5000평의 땅을 상속했다. 그나마 이 땅도 ‘유한동산’으로 꾸미고 유한중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해 ‘젊은 의지’를 죽어서도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손녀 유일링 양(당시 7세)이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자금으로 쓰도록 주식의 배당금 가운데서 1만 달러 정도(당시 환율로 약 320만 원)를 마련해 달라고 당부했다. 1980년대 초 초등학교 6학년2학기 도덕 교과서에는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71년 봄 어느 날, 신문을 받아 본 사람들의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진정한 애국자구나! 이런 기업가들이 앞으로 많이 나와야겠는데 가진 자는 더 가지기를 원하건만 이 분만은…” 하면서 기뻐했습니다. 우리나라 제약업계에 큰 공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다 간 유일한 선생의 유언장이 세상에 공개된 것입니다.>
유일한 박사는 경영은 물론 기업의 지배구조 면에서나 납세 부분에서도 다른 기업들의 모범이 됐다. 1926년 유한양행을 창업해 업계 2위의 제약회사로 키웠으며 1962년 경성방직에 이어 두 번째로 기업공개를 했다. 상장 목적에 대해 그는 “우리나라 기업이 한두 사람의 손에 이뤄져서는 발전할 수 없다. 여러 사람이 참여함으로 해서 회사가 다소 귀찮을지는 모르지만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또 관행이었던 경영권 2세 상속을 과감히 버리고 주주총회에서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에게 이양했다.
1967년에는 기업들의 엄청난 탈세가 드러나 사회적으로 시끄러웠다. 정부는 유한양행에 대해서도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다른 기업들과는 달리 유한양행은 한 번의 착오도 없이 성실히 세금을 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한양행은 이듬해인 1968년에는 모범 납세 우량기업으로 선정돼 대통령으로부터 동탑 산업훈장을 받은 최초의 기업이 됐다. 이 덕분에 ‘한국 제일의 자진 납세 업체, 한국 제일의 장부 공개 업체’ 라고 불리기도 했다.
자신의 최고의 창조물인 기업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창업자에게 있어 최선의 행위일 것이다. 부에 대한 추구는 자본주의의 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일한 박사는 달랐다. 2세에게 모두 물려주는 관행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는 이미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현재의 관점에서도 놀라울 정도의 깨끗한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을 사회에 환원하며 세상을 떠났다. 일부 대기업 총수들이 횡령, 탈세 등의 혐의로 법의 심판대에 선 요즘, 그의 아름다운 유언장과 성실한 납세가 다시 생각난다.
김선우 기자 [email protected]
필자는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 인문지리학을 전공하고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2001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문화부, 경제부, 산업부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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