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무수히 많습니다. 경영학,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 연구자 중 상당수는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신뢰를 꼽습니다. 신뢰는 상품과 서비스 등 각종 거래를 가능케 하는 요소입니다. 인간관계도 신뢰가 없으면 장기적,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직이론가 리처드 골렘뷰스키(Richard Golembiewski)는 “개인 간은 물론 그룹 행동에서 신뢰만큼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동양 철학에서도 신뢰를 중시하는 전통이 강합니다. 공자는 국가 경영의 요체로 군사력, 경제력, 신뢰 등 3가지를 꼽았습니다. 하지만 중요성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공자는 부득이하게 이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군사력을, 또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경제력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신뢰는 국가나 사회 시스템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라는 것입니다.
2500년 전 공자의 통찰은 현대에서 더 빛을 발합니다. 경제가 발전하고 경제주체 간 연결성이 높아지면서 신뢰가 미치는 영향력은 더 커졌습니다. 실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실생활에서 신뢰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전자상거래를 할 때 복잡한 절차를 거치며 큰 불편을 경험해야 하는 이유는 신뢰도 수준 때문입니다. 9·11 테러 이후 신뢰 수준이 낮아지면서 비행기 탑승 수속 시간은 하염없이 길어졌고 전 사회적으로 큰 비용이 발생했습니다. 낯선 개발도상국 기업과 거래를 할 때에는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법률, 회계, 컨설팅 등 상당한 비용을 부담해야 합니다. 과거 외환위기와 현재 금융위기 모두 근본적으로 신뢰 문제에서 비롯됐습니다.
치열한 비즈니스 전장에서 신뢰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기 위해서는 단기가 아닌 장기적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신뢰는 장기적 상호작용 과정에서 생겨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한 심리학자는 좋은 결정, 나쁜 결정이 있는 게 아니라 단기적 혹은 장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결정이 있을 뿐이라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우리의 수많은 의사결정은 본질적으로 단기 혹은 장기 이익 중 하나를 극대화하려는 동인을 갖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신뢰라는 관점에서 보면 답은 명확합니다. 단기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장기적 이익을 선택하는 것이 신뢰 자산 축적에 도움을 줍니다. 과거 갑작스러운 홍수 때문에 공사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황에서 임직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큰 손해를 감수하며 고령교 공사를 마무리한 고(故) 아산 정주영 회장이 이후 관급공사를 싹쓸이한 것은 장기적 이익을 추구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신뢰는 또 말이 아닌 행동을 필요로 합니다. 과거 불량 휴대전화를 모아놓고 불태웠던 삼성전자나 납품 과정에서 사소한 문제가 발생해도 전량 제품을 회수하며 손해를 기꺼이 감수한 기업들은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신뢰 형성에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신뢰는 정체성 혹은 철학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사업에 대한 남다른 철학, 삶에 대한 고유의 원칙 등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기업이나 개인은 신뢰 자산을 훨씬 효과적으로 축적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신뢰 위기’의 시대입니다. DBR은 이런 시대에 역설적으로 신뢰를 무기로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 신뢰 문제를 스페셜 리포트 주제로 정했습니다. 신뢰는 학문적으로 접근하기 만만치 않은 주제입니다. 신뢰의 양상이나 원천, 형태 등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신뢰’라는 말을 정의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인문·사회과학자들의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뢰 자산을 얻기 위한 방법론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입니다. 신뢰자산을 확보하기 위한 여정에 도움이 되도록 이번 스페셜 리포트는 신뢰의 원천, 기업의 신뢰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 고신뢰 조직 구축 방안 등을 제시했습니다. 신뢰를 얻기까지는 20년이 걸리지만 잃는 데는 5분이면 충분하다는 말처럼 위기 한 번으로 그동안 쌓은 신뢰가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위기를 오히려 신뢰 회복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한 대안도 제시했습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신뢰도 깊은 통찰을 줍니다. 이번 스페셜 리포트가 신뢰 자산의 축적을 통한 경쟁력 강화에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김남국 편집장·국제경영학 박사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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