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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Philosophy

거리에서 탄생한 힙합예술 “관행과 틀을 벗어라”

박영욱 | 218호 (2017년 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거리는 질서와 무질서, 좋은 냄새와 역한 냄새, 아름다운 말씨와 욕설이 얽혀 있는 역동적인 삶의 공간이자 예술 그 자체이다. 힙합과 그래피티 예술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거리에서 탄생됐다. 예술이 아름다움과 상상력, 자기완결성을 지닌 유기체라는 전통적인 생각에서 이제 벗어나라. 거리는 아름답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 자체가 예술의 장(場)이다.



편집자주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공유점을 포착해 철학사상을 감각적인 예술적 형상으로 풀어내온 박영욱 교수가 DBR에 ‘Art & Philosophy’ 코너를 연재합니다. 철학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즐거운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길거리도 갤러리가 될 수 있다고?

2005년 청계천이 복구되면서 관심을 끌었던 것 중 하나는 이를 상징하는 조각품이다. 청계천이 시작되는 초입에 설치된 높이 20미터의 대형 조각 작품은 청계천의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스프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미국에서 활동하는 스웨덴 출신의 유명한 조각가 올덴버그(Claes Thure Oldenburg, 1929∼)에 의해서 제작됐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올덴버그의 작품이 청계천 거리에 설치되기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미리 접하고 들뜨기도 했다. 유명한 조각품을 보기 위해 관람료를 내지 않고도, 또 특별히 어려운 발걸음을 하지 않고도 무심코 흘깃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꿈같은 혜택일지 모른다. 예술작품이 갤러리가 아닌 길거리에 전시됨으로써 길거리 자체가 예술적인 공간, 즉 갤러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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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렇게 길거리를 예술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흔히 우리가 ‘공공미술(Public Art)’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예술 형태가 지향하는 바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공공미술을 주도하는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APAP·Anyang Public Art Project)는 이 프로젝트가 ‘대중들이 일상에서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도시 자체를 하나의 갤러리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2005년부터 시작해 3년마다 열리는 이 프로젝트 전시는 현재 22명의 국내외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예술작품을 공공의 장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이 프로젝트 전시가 열리는 안양예술공원은 개장 당시부터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상설 전시됨으로써 많은 관심을 받았다. 공원과 같은 공공 공간을 갤러리로 만듦으로써 예술이 지니는 본래의 공공성을 회복한다는 취지다.

예술이 갤러리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공공적인 특성을 지녀야 한다는 지향점은 20세기 후반 공공미술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본디 예술이 지닌 가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의 공공성을 추구하는 일이 전통적 가치를 복원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사실 미술품들이 박물관이나 갤러리라는 특정한 전시공간에 갇히기 전까지 예술작품은 일상과 크게 구분되지 않은 공공의 장소에 존재해왔다. 가령 그리스를 대표하는 조각은 독립된 공간에 전시된 것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드나드는 신전을 장식하는 일부분이었다. 중세나 르네상스 시기의 그림들 역시 대부분 벽화였으며 이것은 글로 쓰인 성경을 대신해 ‘보이는 성경’으로서 일반인들에게 복음을 알리는 공공의 성격을 지녔다.

루터나 칼뱅의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소수의 엘리트 집단을 제외하고는 희랍어나 라틴어로 쓰인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가치인 교리를 공유하는 공공적 수단이었다. 중세나 르네상스 그림에서 이미지들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공유된 뜻을 담고 있는 도상 기호(icon)로 간주돼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령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비둘기는 평화를, 단검을 들고 있는 남자는 성 세바스찬을, 13명의 남자들이 식탁 위에 있는 장면은 최후의 만찬을 의미하는 도상으로 해석돼야 한다. 이들 그림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코드로 이뤄진 공공의 텍스트였던 것이다.

근대 이후 박물관과 갤러리는 예술작품의 공공성을 제한하는 역기능을 낳았다. 이러한 관행에 대한 예술가들의 간헐적인 반발도 이어졌다. 가령 프랑스의 설치 작가 뷔랑(Daniel Buren, 1938∼)의 작업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프레임 내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Within and Beyond Frame, 1973)에서 자신의 서명과도 같은 줄무늬 모양의 깃발을 갤러리 내부 공간뿐만 아니라 갤러리 창을 통해 반대 건물의 벽까지 확장함으로써 갤러리의 내부와 외부 경계를 없애고 연속적인 공간으로 바꾸어버렸다. 이것은 갤러리라는 제도적 공간에 대한 풍자와 예술의 공공적 특성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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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렇게 박물관 혹은 갤러리라는 한정된 공간의 벽과 창살을 뚫고 수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원이나 거리와 같은 공공의 장소에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예술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일까? 달리 말하면 대중들이 일상에서 예술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거리 자체를 갤러리로 만드는 것이 공공미술의 미덕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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