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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디자인과 경영

'What'이라는 디자인, 'Why'라는 디자인, 소비자는 어떤 디자인을 원할까

조성환,김경묵 | 231호 (2017년 8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디자인경영은 20세기 기업 혁신 동력의 일환으로 크게 각광받아 왔다. 하지만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디자인경영이 일반화됨에 따라 더 이상 기술과 외형 중심의 산업디자인만으로는 차별화된 제품을 내놓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디자인에 생각을 담는 인문디자인이 필요한 시대다. ‘무(無)’의 개념을 담아 프랑스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무인양품, 아이들이 어떤 장난감을 좋아하는지가 아니라 왜 노는지에 주목한 레고, 전통에서 혁신을 재발견한 샤넬 암스테르담 매장 사례에 주목하자.

편집자주

디자인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인문디자인’의 철학과 방법론을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의 연구자들이 연재합니다.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은 사회과학 중심의 디자인경영의 한계를 넘어서 인문적 사유에 근거한 디자인경영 이론을 구축해 한국 사회에 확산시키기 위한 학제 간 연구 공동체입니다.


20세기 디자인경영의 대두

파나소닉의 창시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는 서구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오는 공항에서 “앞으로는 디자인의 시대”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이 말의 진의 여부에 대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당시의 마쓰시타가 하고 있는 생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이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 시점이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이라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마쓰시타의 이 한마디는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서 디자인이 차지하는 위상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일본의 산업화 성공 요인 가운데 디자인이 보이지 않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나소닉을 비롯해 소니, 혼다, 그리고 최근의 무인양품과 츠타야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근대화는 디자인경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의 경우를 보자.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1979년에 취임 후 가진 첫 각료회의에서 “Design or Resign(디자인하지 않으면 사임하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국가가 주도해 디자인을 산업 혁신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선언으로 그런 의미에서는 국가 주도의 디자인경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에 대처의 디자인경영이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1 

이처럼 디자인경영은 20세기에 기업 혁신 동력의 일환으로 크게 각광받아 왔는데 최근에 들어서는 그 한계 또한 드러나고 있다. 디자인경영이 일반화됨에 따라 더 이상 기술과 외형 중심의 산업디자인만으로는 차별화된 제품을 내놓기 어려워진 것이다. 기술은 전 세계적으로 점점 평준화되고 있는 데다 기술편향적인 디자인경영은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또한 시각적인 스타일링만으로는 그것이 지닌 태생적 한계로 인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도 어렵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인문디자인’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산업디자인에서 인문디자인으로

인문디자인은 디자인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태도를 말한다. 여기에서 인문학적 관점이란 사물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말한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것과 관련된 활동이나 주변 환경까지 고려한 전체적인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관점이다. 반면 종래의 산업디자인은 디자인을 주로 도구적 관점이나 외형적 관점에서 이해했다. 보다 편리한 도구, 보다 보기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디자인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놓치고 말았다. ‘도구’라는 부분에 집착한 나머지 그 도구를 도구이게 하는 전체를 보지 못한 것이다.

부분에 집착하는 산업디자인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구글글라스다. 구글글라스는 안경에 카메라 기능을 부착한 혁신적인 제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편리함에만 주목한 나머지 정작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놓치고 말았다. 부분적인 편리함에만 집중한 탓에 전체적인 편안함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 결과 편리함이 오히려 불편함을 낳고 말았다.

인간의 눈이란 카메라와 같은 기계적 눈이 아니라 실존적 눈이다. 즉, 밖의 대상을 거울처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것들이 드러날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시선이다. 그런데 구글글라스는 이렇게 세상을 디자인하고 만들어내는 시선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게다가 눈의 허락도 없이 눈앞에 나타나는 대상의 정보를 끊임없이 띄워놓는다. 그래서 눈은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구글글라스를 벗어 던지거나, 아니면 구글글라스에 예속돼 글라스가 띄워주는 정보만을 따라다니는 멍청한 렌즈로 전락한다.2 

이것은 도구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기능적 편리함이나 기술적 완성도의 차원에서만 접근한 결과다. ‘본다’고 하는 인간 행위가 지니는 포괄적인 의미에 대한 성찰 없이 단지 도구 그 자체에만 주목한 것이다. 그 결과 도구는 오히려 인간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배제된 채 제작된 도구가 결국에는 인간에 의해 소외되고 만 것이다.

반면에 레고의 재기(再起)는 인문디자인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과거 블록 장난감으로 큰 성공을 거뒀던 레고사는 컴퓨터 게임의 등장으로 불황을 겪게 된다. 그래서 게임 산업에 뛰어들기도 하고 아이들이 보다 ‘쉽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그래서 레고는 덴마크의 컨설팅 회사에 도움을 요청했다. 거기에서 얻은 조언은 “아이들이 무슨 장난감을 좋아하는가?”가 아니라 “아이들은 왜 노는가?”에 주목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레고 조사팀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직접 관찰하기 시작했다. 장난감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아이들에게 주목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아이들은 쉬운 놀이보다는 오히려 어려운 놀이에서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레고는 어른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복잡하고 시간을 요하는 제품들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재기에 성공해 오늘날과 같은 ‘제2의 레고’가 된다.3 

아이들에게는 어려움이 오히려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레고는 발견했다. 이런 통찰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도구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주목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어떤’(what)’이라는 질문에서 ‘왜’(why)’라는 질문으로 관심을 돌렸기 때문이다. ‘무엇’이 도구적 관점에서의 물음이라면 ‘왜’는 인문학적 차원의 물음이다. 이렇게 질문을 바꾸자 주목하는 대상도 ‘도구’ 그 자체에서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그래서 “어떤 장난감이 잘 팔리는가?”나 “어떤 장난감을 어린이가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어린이는 ‘왜’ 놀이를 즐거워하는가?”나 “아이들에게 놀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레고의 부활은 ‘장난감’이라는 도구를 ‘놀이’라고 하는 인간의 행위와의 연관 속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물음이 혁신적인 제품으로 이어진 대표적인 ‘인문디자인’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생각을 담는 디자인

인문디자인은 ‘디자인’이라는 개념 그 자체부터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데서 출발한다. 원래 디자인이란 말은 ‘de’와 ‘sign’의 합성어로 ‘sign’은 ‘기호’, ‘de’는 ’부여하다’는 뜻이다. ‘designare’(데지그나레)는 ‘기호로 가리키다’는 뜻의 라틴어다. ‘기호’는 ‘생각’이나 ‘의미’를 표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결국 디자인이란 “새로운 생각을 나타내다”는 뜻이 된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의미의 재해석이나 재구성 작업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담고자 하려면 먼저 생각을 개념화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이 개념화돼야 그것이 ‘사상’이 되고, 사상이 체계화되면 ‘철학’의 단계로 들어간다. 종래의 산업디자인은 생각을 개념화하는 과정을 소홀히 한 나머지 제품에 사상과 철학을 담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제품에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담아내지 못했다. 반면에 인문디자인은 생각을 개념화하고 개념화한 것을 상품화하는 두 개의 과정으로 이뤄져 있다. 거기에는 일관된 사상이 반영돼 있고 그래서 기업의 아이덴티티가 녹아 있다.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와 인문학

디자인의 어원적 의미가 생각을 담는 것이라면 혁신적인 디자인이란 혁신적인 생각이 담긴 디자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혁신적인 생각이란 전적으로 새로운 생각을 말하는데 생각이 새롭기 위해선 먼저 기존의 생각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서양의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이라고 하면 문학·역사·철학과 같은 특정 학문이나 고전에 대한 소양 정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말하는 리버럴 아츠는 이런 의미의 인문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의 편집책임을 맡았던 조앤 마그레타(Joan Magretta)는 리버럴 아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경영은 경제학이나 공학에 관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경영은 오히려 사람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제대로 이해되면 경영은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다.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모든 학문들로부터 자유롭게 얻어낼 수 있다(drawing freely from all the disciples)는 점에서 그러하다. 바로 이것이 경영이 궁극적으로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까닭이고, 그래서 잘하기 어려운 것이다.”4  


이에 의하면 리버럴 아츠란 문학이나 역사나 철학, 또는 이것들의 총합과 같이 일정하게 분야가 정해져 있는 특정 학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일정한 전공(subject matter) 없이 말 그대로 ‘자유롭게(liberal)’ 사고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인문학은 오히려 ‘리버럴’ 하지 않은 것 같다. 특정한 학문 분야에 얽매여 있고, 나아가서 ‘성인의 가르침’(聖敎)이라는 사상 형태나 사회적 규범에 구속돼 있기 때문이다. 전통시대에 유교나 불교, 또는 도교라고 할 때의 ‘교’는 종교(religion)라기보다는 ‘가르침’(teaching)을 의미했는데,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우리의 사고가 스승의 가르침이나 윗사람의 말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고가 자유롭기(liberal)보다는 오히려 틀에 박혀 있는(conventional) 경향이 강하다.

반면에 “자유롭게 끄집어낸다(freely draw from)”라는 조앤 마그레타의 표현에 의하면 서양의 리버럴 아츠의 핵심에는 특정 분야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 즉 리버럴 싱킹(liberal thinking)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디자인싱킹’에 철학적 틀을 제공한 카네기멜런대 디자인스쿨의 리처드 뷰캐넌(Richard Buchanan) 교수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뷰캐넌은 서양의 리버럴 아츠 전통에 입각해서 디자인을 “특정 분야가 정해져 있지 않는 통합적 학문”으로 새롭게 규정했다.5   조앤 마그레타가 경영을 리버럴 아츠로 이해했다면 뷰캐넌은 디자인을 리버럴 아츠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인문디자인경영’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여기에서의 ‘인문’이란 사물을 총체적 관점에서 보는 것뿐만 아니라 리버럴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인문디자인경영에서의 디자인과 경영은 리버럴 아츠에 바탕을 둔 디자인과 경영을 의미한다. 인문디자인경영은 ‘인문학-디자인-경영’을 일련의 상관연동적인 활동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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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성환

    조성환

    -사단법인 한국조직경영개발학회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 상임이사, 인문학공장 편집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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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묵

    김경묵[email protected]

    -(현)성균관대 초빙교수, 사단법인 한국조직경영개발학회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 부회장 겸 원장, 인문학공장 대표, 디자인철학 자문위원
    -(전)삼성전자 수석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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