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준비생의 도쿄
도쿄 시내의 외곽에 자리 잡은 기치조지에는 5평 남짓한 가게 ‘놋토(Knot)’가 있다. 손목시계 맞춤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인 놋토는 2014년 오프라인 매장 없이 온라인으로만 맞춤 제작 시계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일본 소비자들은 예상외로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 매장 오픈 후 첫해의 목표 판매량인 5000개를 4개월 만에 팔아 치웠고, 2016년부터는 매월 1만 개의 시계를 생산해야 할 정도로 수요가 늘어났다. 시계가 외면받기 시작한 스마트폰 시대에도 놋토가 인기를 끄는 비결은 무엇일까?
#1. 모두가 바라던 시계의 시작
놋토를 이끄는 엔도 대표는 루미녹스(Luminox), 베링(BERING), 스카겐(SKAGEN) 등의 유럽 브랜드 시계를 수입해 판매하는 시계 대리점을 15년 동안 운영했다. 그러던 2012년, 미국의 시계 브랜드 파슬(FOSSIL)이 스카겐을 인수하면서 일본 내 유통 채널을 대리점이 아닌 직영점 체제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대리점들은 스카겐을 판매할 수 없게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엔도 대표는 독자 브랜드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가 처음 한 작업은 바로 손목시계의 용도를 ‘재정의’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마트폰 때문에 시계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기능이 약해질 것으로 판단하고 ‘패션’으로 다시 정의하고자 했다. 렌즈와 의료기술의 발달로 안경을 도구가 아닌 패션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시계의 역할도 유사하게 변할 것이라 봤다.
그러나 평범한 세일즈맨들이 ‘패션’을 위해 마치 옷을 사듯 시계를 살 수는 없었다. 수십만 엔을 호가하는 명품 시계는 하나를 갖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저렴한 브랜드의 시계를 사자니 디자인도, 성능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취향 저격의 디자인이면서 품질이 좋은 시계를 합리적 가격에 사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로망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엔도 대표는 이런 잠재고객들을 위해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 시계를 만 엔대의 가격에 제공하는 브랜드를 만들고자 했다.
놋토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브랜드를 알렸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마쿠아케(Makuake)’에서 목표액의 5배인 500만 엔을 모았다. 온라인 채널에서 성공적으로 브랜드를 론칭한 놋토는 오프라인 매장을 열기 위해 2차 펀딩을 진행했다. 두 번째 펀딩에서는 ‘영구 회원’ 자격을 핵심 리워드로 내세웠다. 영구 회원에게는 평생 할인 혜택을 제공하고, 한정판 시계에 몇 번째 투자자인지를 각인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고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놋토는 1차 펀딩의 2배가 넘는 금액인 1181만 엔을 모금했다. 주 타깃 고객인 20∼30대를 중심으로 놋토의 탄생을 알렸으며, 영구 회원으로 대표되는 충성고객을 확보했다.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에서 ‘제한된 기간’ 내 ‘한정판’ 판매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2. 합리적 시계의 품격
‘누구도 본 적 없는 것’을 바꿔 말하면, ‘누구도 원치 않았던 것’이거나 ‘원하지만 현실로 구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놋토가 추구하는 바는 후자였다. 그래서 놋토는 모두의 바람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시계의 가성비에 집중했다. 명품 시계의 품질에 버금가는 프리미엄 시계를, 명품 시계 가격이 아닌 ‘1만 엔대’에 판매하면서 합리적 가격의 브랜드를 지향했다.
놋토는 ‘All made in Japan’을 바탕으로 프리미엄 시계의 품격을 보여주는 브랜드다. 특히 품질이 우수한 일본산 재료와 부품만을 사용하는데 ‘무수부 프로젝트(MUSUBU Project)’를 통해 일본의 장인정신을 손목시계에 담으며 품질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일본의 2대 가죽 작업장(tannery)인 토치 가죽과 히메지 가죽, 일본의 하이 비트 무브먼트의 자존심인 시티즌, 세계 최고 수준의 정밀 금속 가공 기술을 자랑하는 하야시 세이키 등 일본 전역의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세계 시장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품질의 제품을 개발한 것이다.
놋토는 품질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았지만 비용을 낮추기 위해 유통 마진과 제반 비용을 최소화했다. 일본 시계 업계 최초로 제조유통일괄형(SPA) 브랜드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해 제품의 기획에서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직접 운영하며 유통 마진을 혁신적으로 줄였다. 또한 완제품 판매가 아닌 모듈화를 통한 맞춤형 판매는 재고 리스크를 줄일 수 있어 손실률을 낮출 수 있다. 게다가 도쿄 외곽에 있는 기치조지, 그것도 역세권에서 떨어진 골목에 첫 매장을 오픈한 것도 임대료를 줄이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3. 나만을 위한 시계의 완성
모두가 바라던 시계라도 다수가 갖게 되면 인기를 잃는다. 그래서 놋토는 완제품을 판매하지 않고 시계 본체, 스트랩, 버클 등을 따로 판매해 고객이 자신의 취향대로 조합해 시계를 완성할 수 있도록 했다. 각각의 옵션이 다양하게 구비돼 있어 5000가지 이상의 조합이 가능하다. 고객들이 같은 시계를 가질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드는 것이다. 이름, 기념일, 메시지를 각인해주는 서비스를 이용하면 더욱 특별해진다. 또한 고객들은 놋토의 스트랩에 장착돼 있는 ‘이지 레버(Easy lever)’ 덕분에 특별한 공구가 없어도 집에서 쉽게 스트랩을 갈아 끼울 수 있다. 스트랩을 교체하기 위해 시계 매장을 방문해야 했던 기존의 불편함을 해소해 맞춤 시계의 편의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것이다.
놋토는 매장도 ‘맞춤식’으로 디자인했다. 보통의 시계 매장은 쇼케이스형으로 디스플레이를 한다. 제품을 깔끔하게 보여주고, 제품을 보호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놋토 매장은 개방형 디스플레이를 선택했다. 모든 제품은 유리판이 없는 선반 위에 일렬로 놓여 있다. 매장을 방문한 고객들이 보다 편리하게 다양한 옵션을 시험 삼아 착용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제품을 보호하는 것보다 고객의 취향을 우선시한다는 뜻이다. 공식 웹사이트에서도 고객이 옵션을 선택할 때마다 조합의 결과를 이미지로 바로 구현해준다. 구매 페이지로 서둘러 넘어가도록 유도하기보다는 고객이 마음에 드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프리미엄 시계의 자격
유럽 명품 시계들은 오랜 역사와 장인정신으로 품질이 탁월하지만 비싼 가격 때문에 부담이 되고 일상보다는 특별한 날에 어울리는 편이다. 그러나 놋토는 일본 브랜드 특유의 세련된 디자인과 우수한 기술력이 접목한 시계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해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편안한 럭셔리’를 구현했다. 놋토 스스로가 ‘프리미엄’ 시계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이유다.
놋토는 일본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에도 진출할 예정이다. 2017년 초 첫 해외 지점을 대만에 오픈한 것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해외 시장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 진출을 통해 2020년에는 10배 더 성장할 것을 목표로 할 만큼 포부가 크다. ‘놋토’는 매듭이라는 뜻이다. 세계와 일본의 장인정신을 이을 뿐만 아니라 대중과 럭셔리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겠다는 목표가 느껴지는 브랜드명이다.
편집자주
같은 장소에 여행을 떠나도 안정된 직장이 있으면 사업 아이디어를 거의 찾지 못하지만 퇴사를 준비하고 있거나 독립한 상황이라면 수많은 신사업 거리를 찾곤 합니다. 퇴사준비생의 시선에서 도쿄 여행을 하며 찾아낸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이동진 대표의 인사이트를 소개합니다. 이 원고는 저서 『퇴사준비생의 도쿄(더 퀘스트, 2017)』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이동진 트래블코드 대표 [email protected]
필자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올리버와이만과 CJ E&M에서 전략기획 업무를 수행했다. 현재는 여행의 가치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여행사 트래블코드를 운영하고 있다.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퇴사준비생의 도쿄』를 공동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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