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포터 교수가 서울에 다녀갔다. 동아일보와 채널A가 공동 주최한 ‘동아비즈니스포럼 2011’에 참석해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하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적 방법론으로 일컬어지는 CSV(Creating Shared Value)의 개념을 소개하고 강연 및 대담을 하기 위해서다. 필자도 포럼에 참석해 강연과 대담을 들었는데 역시 대가답게 이해하기 쉽고 간결한 어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일찍이 기업들의 본원적 경쟁전략은 원가우위 전략, 차별화 전략, 집중 전략, 이 세 가지밖에 없다는 점을 명쾌하게 분석했다. 이러한 경쟁전략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경쟁기업, 공급자, 수요자, 대체품, 잠재적 진입자의 5가지 요소를 제시한 5 Forces Analysis를 통해 경영학계에 그야말로 폭풍을 몰고 온 천재였다. 그는 기업 성과에 영향을 주는 기업 활동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가치사슬(Value Chain) 모형을 제시함으로써 기업들이 경쟁우위를 강화하거나 개선하기 위한 실천적 지침들을 제시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이론적 틀에 대한 비판에 대응해 그것을 계속 보완하고 수정해나가는 차원에 머문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차원의 분석틀을 지속적으로 제시했다. 한때 그의 이론들은 기술발전 등의 동태적 환경변화를 도외시한 채 지나치게 정태적이라거나 경험적, 실증적 증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소수의 연구사례를 통해 도출된 결론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분석틀은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간결하고 과거의 경쟁기업 간의 경쟁행태만을 분석하던 이론들에 비해 시야를 확장시켜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갈채와 환호를 받았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기업들이 본연의 책무를 기업만을 위한 가치 창출이 아니라 기업과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재정립함으로써 당면한 글로벌 경제위기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의 CSV를 들고 나왔다. 기업이 이미 창출한 이익을 기반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해 기부행위를 하거나 이익의 일부를 이전하는 식의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로는 지속적으로 사회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없고, 경제 영역과 사회 영역의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비즈니스 영역을 개척하는 것만이 기업과 사회의 이분법적 갈등을 해결하고 자본주의를 본궤도에 다시 올려놓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필자는 여기서 CSV 개념의 정당성이나 참신성, 또는 현실성을 평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사회 영역의 문제는 항상 경제의 외부효과로서 경영 또는 경제학자들의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요인이었고 그 부분을 얼마나 시장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느냐 하는 문제는 경제학에서 시장조직론이라는 세부 영역으로 따로 발전해가고 있다. 정작 필자가 마이클 포터 교수로부터 감명받은 점은 그가 과거의 생각과 이론적 틀에 매달리고 고집하기보다는 기업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직시하고 받아들여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모델을 제시하려고 애쓴다는 점이었다. 어찌 보면 그는 멈춤을 아는 인물이다. 그의 이론이 한참 각광받을 때마다 그는 기존 작업을 멈췄다. 그리고는 새로운 고민을 하고, 새로운 화두를 던지며,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이번에는 CSV였다.
멈춤을 안다는 것
아시아 최고의 갑부인 홍콩의 청쿵(長江)그룹 회장 리카싱(李嘉誠)의 좌우명 가운데 하나는 지지(知止)라고 한다. 홍콩 사람들이 1달러를 쓰면 그 중 5센트는 리카싱의 호주머니에 들어간다고 하는 바로 그 사람의 좌우명이 ‘멈춤을 안다’이다. 그는 실제로 1956년 이래 반세기 동안 무차입, 안정경영을 실천했고 전 재산의 3분의1인 6조 원을 출연해 기금을 만들어서 사회에 환원했다. 그가 말하는 멈춤은 사실 도약을 위한 준비다. 한번 써먹어서 성공한 방식이라고 해서 계속 고집해서는 안 되며 적당한 시점에 멈추고 다른 방식을 생각해야 한다. 개구리도 멀리 뛰려면 엉금엉금 기던 것을 멈춰야 한다. 지금껏 하던 일을 그대로 계속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이룰 수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일이 잘 풀리고 만족할 만할 때는 그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지금껏 해오던 일이 예전 같지 않고 잘 풀리지 않을 때 그것을 그만두려 하면 이미 늦는 경우가 많다. 그때는 그만 두는 것도 쉽지 않다. 기업활동을 예로 들면 이미 설비는 잔뜩 들여 놓았고, 대금은 치르지 못했고, 시장에 재고는 풀려 있는데 팔리지는 않고, 자금회수는 점점 더뎌진다. 발을 빼려고 해도 설비 값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졌거나 팔리지 않고 시장에 풀린 재고를 회수하는 데에 돈이 들어간다. 사업 사이클이 아주 길거나 거의 없다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사업들은 나름대로의 사이클을 갖고 있다. 그래서 경기가 좋을 때 다음에 다가올 바닥 사이클에 미리 대비하거나 새로운 사업으로의 전환을 검토해야 한다. 바닥 사이클에 진입한 후에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다.
한때 잘나가던 기업들이 위기에 몰리고 뒷전으로 처지는 것도 대부분 그들의 사업이 승승장구할 때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그것만을 고집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 기술로 승승장구하던 소니가 사업구조를 전환할 적절한 타이밍을 놓친 후에 삼성전자에 한참 뒤처지게 된 것은 대표적인 예다. 한때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3분의1 이상을 장악하던 노키아는 먼저 관련된 기술을 개발해놓고도 스마트폰으로의 전환을 미루고 기존 시장에서의 달콤한 성과를 즐기다가 위기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다. 사실 노키아가 세계적 기업이 된 것은 1990년대 초 요르마 올릴라(Jorma Ollila)가 새로운 CEO가 된 후 그룹의 모태사업이었던 제지, 펄프사업뿐 아니라 주력사업이던 고무, 타이어, 가전, PC 등을 모두 정리하고 통신사업에 집중한 덕이었다. ‘핀란드 경제의 모세’라고 불리던 올릴라 회장이 2006년 CEO에서 물러난 후 노키아는 휴대전화 제조업체에서 인터넷 서비스업체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작 위기는 잘나가던 기존의 주력사업, 즉 휴대전화 제조업에서 찾아왔다. 멈추고 버리기보다는 단지 조금씩 덧붙여보자는 전략으로는 급변하는 환경 변화와 경쟁업체들의 시장재편성에 휩쓸려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최고의 경쟁력이 변화의 발목을 잡는 최고의 덫이 될 수 있다.
전쟁이 끝났으면 말에서 내려야 한다
멈춤을 안다는 것은 꼭 사업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전략 덕분이었다. 그 전략은 전체적으로 소수의 병력이지만 엄청난 기동력을 발휘해서 단일 전장에서의 수적 우세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과 워털루전투에서는 그의 전략을 꿰뚫고 있던 상대편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몇 번의 승리를 가져다준 전략이 항상 성공을 보장할 것으로 믿은 대가는 아주 혹독했다. 전 미국 대통령인 조지 w 부시는 9·11 사태로 위기에 몰린 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감행해서 재선에 성공했다. ‘악과의 전쟁’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국민들을 결집해 정치적 인기를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추악한 전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정도로 명분이 약하고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바로 그 전쟁으로 인해서 물러날 때는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됐다. 전쟁에서 발을 빼고 국민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새로운 정책으로 전환했어야 했는데 그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잘나갈 때 그동안 품었던 생각과 써왔던 정책, 전략과 방안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멈춰야 한다. 성공을 이뤄가는 과정에서의 장점은 성공을 이뤘을 때 써먹을 수 있는 장점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고조 유방의 중국 재통일에 크게 기여한 육가(陸賈)는 “말 위에서 나라를 얻었다고 말 위에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다”며 문무병용(文武倂用)을 주장했다. 전쟁이 끝났으면 말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나라가 법가사상을 기반으로 강압적인 통치를 계속하다가 몇 십 년을 버티지 못한 것과 달리 한나라는 문무병용을 바탕으로 몇 백 년을 이어갔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지금 나의 경쟁력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야겠지만 그것이 언제든지 나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최대의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창한 언변과 친화력을 발휘해서 공직에 진출한 사람들은 대개 그 친화력과 언변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다. 회사 내 특정 사업이나 기능에서의 성과를 뛰어나게 올려 CEO가 된 사람은 과거 성과의 기반을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전체적인 시야를 확보하고 중심을 잡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입장과 처지가 바뀌지 않아도 나를 둘러싼 환경은 계속 변한다. 그래서 멈출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적당한 때 멈춰 서서 새로운 것의 기회를 면밀히 찾고 타이밍을 노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어김없이 한 해가 가고 또 새로운 한 해가 온다. 새해에는 새로운 희망을 담은 새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해지겠지만 보내는 한 해의 말미에는 대개 다른 분주함으로 가득하다. 사실 연말은 생각을 가다듬기에 좋은 시기다. 한 해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새로운 해를 맞을 준비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 생각의 정리 가운데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 가운데 무엇을 멈추고 그만 둬야 할 것인가이다. 성과가 나지 않는 것, 골치 아프게 하는 것, 닥쳐올 문제가 빤히 보이는 것들은 이미 한참 전에 그만뒀어야 했다. 진작에 그만두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이 닥쳐왔고 지금 문제의 한가운데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잘 진행되고 있는 것, 적당히 손에 익어 적당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것,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 가운데 그만둘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찾아보는 연말이 됐으면 한다.
정현천 상무는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1986년 SK그룹에 입사해 회계, 국제금융, 투자가 관리, 구조조정, 해외사업, 전략수립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는 SK에너지 상무로 근무 중이다. 경영학, 경제학, 심리학, 생물학, 인류학, 역사 등 여러 분야의 책을 가리지 않고 읽는 다독가(多讀家)이며 변화 추진을 위한 강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최근 포용을 주제로 한 <나는 왜 사라지고 있을까> 라는 저서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