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ons from Classic -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上
유명한 역사 소설 작가 피터 쉐퍼와 밀로스 포만 감독의 ‘아마데우스(Amadeus)’는 18세기 말엽 유럽 음악계를 대표하는 작곡가였던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라이벌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살리에리가 성실성과 진지함을 무기로 자신의 지위를 차곡차곡 쌓아나갔다면 모차르트는 천재성을 인정받아 20대부터 ‘에스컬레이터형 출세’를 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살리에리는 자신이 갖지 못한 직관과 재능의 문제를 모차르트의 탓으로 돌리며 평생 원망하는 조역(助役)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그의 모습에서 모차르트를 시기하거나 질투할 만한 동기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스트리아의 권위 있는 작곡가였던 살리에리는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 역사,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교양을 갖춘 르네상스맨으로 통했다. 반면 모차르트는 당시 빈 오페라계의 ‘큰손’이었던 요제프 황제가 여러 번 주목하긴 했지만 상연하는 작품마다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던 상황이었다. 역사가 도로시 링크(Dorothea Link)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살리에리를 원망하는 내용으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대본가(Libretto)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가 살리에리와도 활발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훌륭한 이탈리아인 신사분들(살리에리와 다 폰테)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분들이 항상 함께하는 한 저에게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들의 꼼수(A trick of Salieri)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탈리안 오페라를 잘해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말겠습니다.”1
그렇지만 살리에리는 생각보다 후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음악계 후배였던 모차르트를 오히려 인정하며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방향으로 관계를 이끌고자 했던 흔적이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1788년 왕궁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여러 번 지휘하며 후배의 기를 살려준 것이 대표적이다. 또 모차르트가 죽기 1년 전인 1790년 레오폴드 2세 황제의 대관식 미사 때에는 직접 모차르트의 ‘Mass’를 연주해 그의 작품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한편 모차르트 역시 살리에리를 완전히 ‘숙적’으로 취급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원래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고 알려져 있고 사회성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유럽 전역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예술가들과 교분을 쌓았던 영향으로 음악적인 공감대가 있는 이들과는 자주 소통했다. 그러한 모차르트에게 살리에리는 ‘잘 정리된 사전’과 같은 사람이었다. 살리에리가 헨델 이후 유럽 오페라계의 단골 소재인 아르미다(Armida·1차 십자군전쟁의 영웅 아르미다가 예루살렘을 구하는 이야기로 영웅 스토리 기반 오페라의 주요 모티프였다)를 당대의 감각에 맞게 각색해 성공시키자 모차르트는 그 작품에서 도움을 받아 ‘돈 조반니(Don Giovanni)’를 작곡하기에 이른다.
모차르트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작은 아들 프란츠 크사비어(Franz Xavier)와 제자 쥐스마이어(Suzzmayer)는 살리에리의 문하생이 됐다. 서로 상대방에 대한 믿음 없이는 해석이 불가능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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