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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대범하게, 때론 세심하게… 철학이 있는 좋은 CEO, 불가능하지 않다

한근태 | 174호 (2015년 4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자기계발

 

 

사장에게는 양면성이 필요하다. 때론 모든 임원이 반대해도 자기 신념을 밀고 나가는 결단력과 대범함이 필요하다. 어떨 때는 직원 한 사람의 말에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겸허히 경청하며 필요하면 자기 계획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판단 기준이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또한 자기 희생을 하더라도 집단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절제하고 한 기업이나 개인으로서의 이해 득실을 초월한, 누가 보아도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판단 기준을 마음속에 확립해야만 한다. 일본에서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는 좋은 사장이 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교세라의 경영자 이나모리 가즈오는 마쓰시타전기의 마쓰시타 고노스케, 혼다를 만든 혼다 소이치로와 함께 경영의 신으로 불린다. 최근 파산 위기에 처한 일본항공(JAL) 회장에 취임해 1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해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을까, 그가 생각하는 경영이란 무엇이고, 사장의 도리란 무엇일까? 그가 쓴 책 <사장의 도리>를 소개한다.

 

그는 1932년 일본 가고시마에서 태어나 가고시마대 공학부를 졸업했다. 스물일곱 살 되던 1959년 지인이 출자한 자본금 300만 엔으로 교토세라믹(현 교세라)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파인세라믹스에 관한 기술 개발력을 토대로 각종 전자 부품, 산업용 부품 등의 제조사로 성장했다. 현재 자회사 159, 매출액 4조 엔, 58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를 보면초년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연상된다. 정말 지지리도 꼬인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입학 시험을 두 번 떨어졌다. 대학 시험도 떨어져 원하지 않는 대학, 원하지 않는 학과를 갈 수밖에 없었다. 숙부가 결핵으로 사망했고 그 역시 결핵에 걸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오사카대 의학부 약학과에 들어가길 원했지만 불합격했다. 할 수 없이 지방대인 가고시마대 공학부에 입학해 약학과 조금이나마 관련 있는 유기화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취직도 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주임교수가 쇼후공업이란 곳에 취직을 시켜줬는데 당시 그 회사는 법정관리 상태였다. 그야말로 되는 일이라곤 없는 그런 인생이었던 것이다.

 

법정관리 상태니 급여와 보너스가 제때 나올 리 없었다. 당연히 입사 동기 5명 중 3명은 바로 회사를 그만뒀다. 그 역시 6개월 후 자위대에 지원해 합격했지만 집에서 호적초본을 보내지 않아 자위대 합격이 취소되는 바람에 눌러 앉게 됐다. 동기 중 유일하게 버틴 셈이다. 그 시절 그는 늘 불운을 탓했다. 내 불운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결핵을 앓았고, 중학을 두 번 떨어지고, 대학입시도 실패했고, 쇼후공업같이 상태가 좋지 않은 회사를 다니고 있고그러던 어느 날, 원망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번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을 결코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이 왔다. 어떤 환경에서든 항상 긍정적으로 살자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러자 인생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동안 이 회사는 고압초자 등 중전용 세라믹을 생산했는데 앞으로는 가전용 약전 세라믹이 유망하단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신소재 개발에 앞장섰다. 관련 지식이 없다는 점이 행운으로 작용했다.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발상으로 아무 잡념 없이 연구에만 몰입했다. 재미가 있어 잠자고 먹는 시간마저 잊어버릴 정도였다. 드디어 포스테라이트(fosterite·고토감람석)라는 새로운 세라믹 재료 개발에 성공했다. 1년 전 제너럴일렉트릭이 같은 것을 개발했지만 전혀 다른 방법으로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당시 1950년대 후반은 텔레비전 생산수량이 급격히 증가했던 시기다. 그때까지 네덜란드 필립스로부터 수입을 하던 마쓰시타는 쇼후에 부품제조를 요청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 투입돼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필요한 U자 게르시마 부품 개발에 성공했다. 1956 7월의 일이다. 이 성공으로 이 회사에는 서광이 비친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부하직원을 몇 명 뽑아 같이 일을 했는데 거의 육체노동에 가까웠다. 그는 매일 직원들에게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왜 열심히 일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이론만으로는 세라믹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지금 우리는 도쿄대도 교토대도 하지 못한 고도의 연구를 하고 있다. 우리가 만든 세라믹부품이 없으면 브라운관을 만들 수 없다. 지금까지 아무 연관이 없던 우리가 이렇게 모여 함께 일을 하게 된 것도 인연이니 귀한 만남을 소중히 여기자….” 팀원들과는 힘을 합쳐 열심히 일했지만 외부에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선 노조가 그랬다. 당시 회사는 월급이 적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잔업 수당을 통해 그것을 벌충하려 했다. 평상시에는 대충 일하고 일부러 근무 시간 외에 일해서 돈을 벌려고 했다. 그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야근금지령을 내렸다. 밤을 새우면서 일해도 야근 수당을 신청하지 않았다. 공감한 직원들도 행동을 같이했다. 당연히 노조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1957년 봄 입사 3년째 되는 해 노조에서 파업을 결정했다. 당시 그가 이끄는 특수자기과만이 흑자였다. 생산 시설은 부족하고 수요는 많아 납품 독촉에 시달렸다. 만약 파업을 하면 임금 인상은커녕 내일 먹을 끼니를 걱정하게 될 것이라며 직원들을 설득했다. 결국 이 부서만 파업을 안 하기로 했다. 당연히 노조로부터파업배신자’ ‘회사의 개’ ‘잘난 척하지 마라는 등의 비난을 들었다.

 

 

이나모리 가즈오가 평생 동안 지켜온 경영철학

사장의 도리

저자 이나모리 가즈오, 역자 김윤경, 다산북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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