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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은 생명이다, 지속하고 싶다면 ‘생태계’를 잊지 말라

한근태 | 175호 (2015년 4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자기계발

 

스웨덴 사람들은 사업한다는 뜻의 단어로 내링스리브(Naringsliv)란 말을 쓴다. 영어로생명을 위한 자양분(Nourishment for life)’이란 말이다. 영어의컴퍼니같이 빵을 먹는다는 말이다. 동료들과 더불어 사업을 벌이며 함께 나눌 양식을 얻는다는 말이다. 중국어로도 사업은 생기, 활력, 생명력이란 뜻이 담긴 생의(生意)’. 회사 내에서 직원은 생산과정에 투입돼 할당된 업무를 수행하는 생산자원인 동시에 스스로 주체가 돼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낼 원천이다. 관리의 대상인 동시에 경영의 주체인 것이다. 각 구성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자가 이 회사에서 꼭 필요한 존재라고 느끼게 하는 것은 기업이라는 생태계의 존립을 위해 꼭 필요한 경영 요소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세상을 생존경쟁의 격투장으로 보는 사람은 먹을 것인가, 먹힐 것인가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본다. 주고받는 것으로 세상을 읽는 사람은 늘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우리 생활과 가장 밀접한 주제는 시장, 사람, 기업이다. 여러분은 이 주제에 대해 어떤 패러다임을 갖고 있는가? 혹시 경쟁구도로만 해석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경영은 사람이다>를 읽고 시야를 좀 넓혀보길 권한다. 이 책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신 역설로 풀어간다. 역설을 뜻하는 패러독스(paradox)는 병행이란 뜻의파라(para)’와 믿음이란 뜻의독사(doxa)’로 구성돼 있다. 양자택일의 모순(contradiction)과는 달리 대립하는 두 개의 믿음이 같이 간다는 뜻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이것도 믿고 저것도 믿는 것이다.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역설이다. 현실 문제는 대부분 선택의 문제로 생각한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 다 얻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원가 절감을 위해서는 품질을 희생해야 하고 단기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장기 목표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한 차원 높은 곳에서 보면 둘 다 모두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게 역설이다. 역설은 지혜의 최고점에 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별로 할 일도 없고 재미도 없다. 근데 과연 둘의 양립이 불가능할까? 세상의 많은 문제는 대립의 관계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을 품어 대립의 관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역설의 관계다. 이를 위해서는 시야를 바꾸어야 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그렇다. 죽음은 삶을 포함하고 삶 또한 죽음을 포함한다. 죽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과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어느 편이 잘 살 확률이 높을까? 볼 것도 없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잘 살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면 절대 함부로 살지 않는다. 우리가 함부로 사는 것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죽음과 삶의 문제는 절대 양자택일이 아니다. 대립의 관계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가 서로를 품는 관계다.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속하는 부분집합이 아니고 음과 양의 관계와 같다. 양이 곧 음이 되고, 음이 곧 양이 되는 것이다.

 

시장

여러분은 시장을 어떻게 보는가? 시장은 서로 가진 것을 자발적으로 거래하는 생태계다. 가진 것, 자발적, 거래가 키워드다. 가진 것이 있어야 하고, 자발적으로 해야 하고, 거래가 이뤄져야 한다. 현재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시장을 기계론적 이성주의로만 보고 있는데 가장 큰 폐해 중 하나가 무한경쟁이다. 현대인들은 경쟁에 시달리고 그래서 불안하다. 그런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감능력이 살아 있는 사회적 존재들의축제의 장이 될 수도 있다. 이 또한 역설이다. 이를 위해서는 도덕감정이 필요하다. 애덤 스미스는 원래 철학자였다. 대표작 <도덕감정론>에서 그는 공감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타인의 행복과 불행에 관심을 가진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정서적 느낌이 있다. 타인의 불행과 슬픔, 고통을 목격하면 생생하게 느낀다. 그게 본성이다. 강도에게도 감정은 있다.”

 

우리는 시장 하면 수요 공급 곡선을 떠올린다. 이것의 전제 조건은 인간은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이성적 존재란 것이다. 모든 결과에는 어떤 원인이 있다는 기계론적 사유방식이다. 당구를 칠 때 공을 예측하는 것이 전형적인 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유기론적 생태주의는 다르다. 시장 전체를 하나의 생태계로 본다. 기계는 부품으로 이뤄지고 동력을 넣으면 톱니바퀴들이 돌면서 작동한다. 유기체는 훨씬 복잡하다. 섬세한 화학작용으로 균형을 잡고 서로를 조절한다. 기계론은 나무를 보고 생태론은 숲을 본다. 근대 생태학의 아버지 조지 허친슨은 생태계 전반의 여러 요소를 고려했다. 먹이사슬뿐 아니라 빛, 온도, 습도 등 물리적 요소를 포괄하는 복잡한 관계망에서 조망했다. 특정 생물이 서식하는 물리적 공간 개념에서 출발해 피식자와 포식자로 연결된 먹이사슬의 상호의존성, 서식환경 및 그와의 상호영향 등을 포괄했다. 생태계의 먹이사슬은 지구상 생명들이 서로 의존하며 지속가능한 삶을 꾸려가는 놀라운 방식이다. 약육강식이란 측면도 있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플랑크톤을 먹고 사는 물고기, 이를 먹는 상어, 고래, 인간. 덩치 큰 척추동물도 결국 작은 미생물에게 자기 몸을 내준다. 다양한 종이 서로 베풀고 의존하며 생명을 꾸려가는 것이다. 이누이트족은네가 이제 우리들의 일부가 돼줘 고맙다는 기도를 마치고 사냥한 순록의 숨통을 끊는다. 생태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먹이사슬은 적자생존, 자연선택 같은 냉혹한 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함께 돕고 의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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