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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4. 철학으로 해석하는 병맛과 B급 문화

“엄근진 대신 진정성 있는 저급함”
병맛의 ‘병’은 통쾌한 사이다 병?

박영욱 | 278호 (2019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우리의 삶은 진지하지 않은 무의미와 해명하기 어려운 우발적 사건들, 거짓과 부정의, 혼란과 병균이 마구 뒤섞여 있다. 진지함으로 채워진 예술만으로는 우리의 미감을 충족시킬 수 없다. ‘B급 예술’ ‘병맛 예술’이 시대를 관통하는 이유다. 저급한 B급 문화는 중세시대에도 존재했다. 현실을 풍자하는 우화들이 노래로 만들어져 퍼지곤 했는데 내용은 엄숙함과 거리가 멀었고 당시 중세 교회음악에서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는 장조를 사용했다. 시간이 흘러 ‘병맛’은 대세가 됐다. ‘병신맛’의 약자인 병맛은 하찮고 저급한 맛을 뜻한다. 병맛에는 고상한 것 역시 밑바닥까지 들추면 병맛에 지나지 않는다는 냉소가 전제돼 있다. 병맛의 ‘병’은 가식을 통쾌하게 날려버리는 ‘사이다’의 병을 의미할지 모른다.




저급한 B급 문화는 중세에도 존재했다

‘포벨 이야기(Roman de Fauvel)’는 14세기 초 몰락의 길로 들어서던 중세 말기에 등장한 우화다.(그림 1) 우화의 주인공은 당나귀 혹은 말의 모습을 지닌 포벨인데 그의 이름은 아첨(Flatterie), 탐욕(Avarice), 비열함(Vilenie), 변덕(Variété), 질투(Envie), 게으름(Lâcheté)의 첫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포벨은 당연히 집이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을 벗어나고자 발버둥 친다. 어처구니없게도 어느 날 운명의 여신은 어떤 인간보다 더 엄청난 권력을 그에게 부여한다. 그때부터 재력가, 정치가, 심지어 성직자 등 온갖 사람들이 그에게 아첨을 하며 이윽고 그는 세상의 지배자가 된다.

그 결과 세상이 개판, 아니 당나귀판이 돼버린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다. 정의와 진실, 헌신과 희생이 세상을 지배하기는커녕 당시 최고의 권력을 지닌 성직자들마저도 거짓과 아첨을 일삼는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우화는 마치 우리의 양반전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우화가 그러하듯 이 우화 역시 현실에 대한 풍자다.

이 우화는 노래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다. 물론 이 노래는 중세 사회를 지배하던 교회에서가 아닌 이른바 세속음악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당시 기록을 통해 되살린 ‘포벨 이야기’ 음악은 현재 유튜브를 통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한 곡만 들어보더라도 당시 교회음악인 성가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가음악에서 느끼는 엄숙함과 차분함이 없다. 우화의 내용이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당연한 노릇이다. 그런데 단지 내용이 아닌 음악적인 측면에서 봐도 그렇다. 이 세속적인 ‘포벨 이야기’가 엄숙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교회음악의 음악적 규칙으로부터 일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음의 급격한 비약이 발견된다. 교회의 성가 음악에서는 음이 급격하게 비약하는 것을 금지한다. 교회는 하나의 음 다음에 4도 이상의 간격으로 비약하는 음을 금지했는데, 이는 음의 급격한 비약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을 고양되게 하고 흥분하게 하기 때문이다. 가령, ‘도’ 다음에 ‘솔’이 나오거나 심지어 한 옥타브 높은 ‘도’ 음이 나올 경우 흥분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도약을 금지한 중세의 성가는 매우 밋밋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서 ‘포벨 이야기’는 음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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