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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엽편 소설: 우리가 만날 세계

지구 멸망 5분 전

이경 | 362호 (2023년 02월 Issue 1)

무표정한 얼굴의 스태프가 무신경한 손길로 수민의 얼굴을 몇 번 두드리고 물러났다. 역시 무표정한 얼굴의 다른 스태프가 와서 무신경한 손길로 수민의 셔츠 앞깃에 방송용 마이크를 달았다.

“박수민 님, 여기서 대기하실게요.”

마이크를 달아준 스태프가 수민의 등을 밀어 빨간색 스티커가 붙은 바닥에 세웠다. 그리고 수민의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다른 남자에게로 쌩하니 가버렸다.

커다란 스튜디오는 썰렁했다. 데스크에는 지친 표정의 앵커 한 명만 앉아 있을 뿐, 수민이 상상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헤드폰을 쓰고 바쁘게 뭔가를 외치거나 장비를 체크하며 돌아다니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방송국이 처음인 수민이 단지 뭘 모르는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이런 돌발 상황에서 이런 긴급 방송이 편성됐고 이런 빈약한 패널이 급조되었다면 방송도 급히 불려 나온 인력 몇이서 대강 만 묵사발처럼 돌아가는 게 정상일지도.

“제가요? 제가 어떻게 그런, 뉴스에 나가서 그런 얘길 해요?”

수민은 김 교수의 전화를 받았던 두 시간 전을 떠올렸다. 벨이 울린 건 새벽 2시였고, 그때 수민은 미생물 배양 배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박 선생이 간다고 해놨으니까 잔말 말고 가. 게네들이 준비한 원고 보고, 엉터리 아니다 싶으면 그렇게 읊으면 돼. 생물학 패널이 필요하대서 내가 일부러 박 선생 이름 댄 거야. 이 기회에 공중파 타고 얼굴 알리고, 박 선생한테 나쁠 거 하나도 없잖아, 응?”

듣자마자 기가 차는 소리였다. 말마따나 그간 ‘공중파 타고 얼굴 알릴’ 기회가 있으면 모조리 독식해온 것이 김 교수다. 이번에도 분명히 긴급 섭외 대상은 김 교수였을 것이다. 무슨 공중파 뉴스 패널로 실험실 붙박이 무명 포닥을 불러? 내가 바보도 아니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만 채우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멘트 몇 번 주절거리는 대가로 김 교수 대신 국민 욕받이 되라는 말인 걸 모를 줄 알고?

“저한테 상의도 없이 그렇게 마구잡이로 밀어 넣으시면 어떡해요?”

사정없이 날카로운 대꾸가 튀어 나갔다. 그런데도 평소 같으면 목소리부터 일변해서 ‘어디 박 선생 아니면 사람 없는 줄 알아? 내가 박 선생 잘못 봤네.’ 어쩌고 기분 상한 티를 팍팍 내며 끊었어야 마땅한 사람이 질질 잡고 늘어졌다. 이미 피디한테 말을 해놨는데 한 번만 너그럽게 생각해서 가주라고, 못 할 말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게네도 다 시나리오 짜놓고 생물학자 코멘트 한마디 넣어야 그림이 돼서 부르는 거라며 구구절절 읍소를 해오는 것이다.

이미 다 까였구먼.

순간 깨달음이 수민을 스쳤다. 교수급한테는 다 까이고 이제 만만한 밑에 애들 구슬리러 돌리는 전화였다.

“아, 그럼 교수님이 가시든가요!”

더욱 아니꼬워진 수민이 그렇게 빽 소리를 쳤을 때였다. 쿵, 쿠웅 하는 땅울림 소리와 함께 팟, 하고 불이 나가더니 연구실이 암흑천지로 변했다. 잠시 수민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굳었다. 십수 초간 고요가 지나갔다. 정전이거나 단전 조치인 듯했다. 천만다행히도 지진은 아니었다. 수민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김 교수의 침통한 듯 비굴한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박 선생… 내가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그래서 수민은 김 교수 대신 국민 욕받이가 될 운명을 받아들여 이 스튜디오로 왔다. 사실 휴대폰 플래시에 의지해 캄캄한 건물을 빠져나올 때만 해도 김 교수 따윈 무시하고 집에 돌아갈 작정이었는데 나와 보니 온 세상이 캄캄했다. 과장이 아니라 온 세상이. 수민이 속한 대학은 서울 시내가 바라다보이는 산 중턱에 있었는데 그 아래가 온통 다 캄캄했다. 쥐 죽은 듯 웅크린 서울은 거대 토네이도 주변 사방으로 내리꽂히는 붉은 번갯불에 가끔, 조각조각 비칠 뿐이었다.

그래서 수민은 여기로 왔다. 쌀알만 한 우박을 미친 듯이 흩뿌려대는 폭풍우를 뚫고 7평짜리 원룸으로 기어드느니 방송국에 죽치는 편이 안전할 것 같아서다. 애초에 이 시간에 학교에 있었던 것도 더 안전할 것 같아서가 아닌가. 하여튼 지금은 어디든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곳에 가고 싶었다. 그게 수민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스탠바이, 3, 2,”

스태프가 1을 묵음으로 하고 큐를 줬다.

“안녕하십니까. 현재 시각 새벽 4시17분, 긴급 편성 뉴스데스크를 시작합니다.”

앵커의 멘트가 끝나자 수민과 다른 남자 하나, 그리고 앵커까지 달랑 셋 앉은 데스크 뒤로 중계 화면이 송출됐다. 하나같이 캄캄하고 번쩍거리는 폐쇄회로 TV 화면들이었다. 서울은 물론 전국이 다 정전 상태였다. 화재 등을 우려한 선제적 단전 조치도 있었겠지만 끊긴 고압 송전선에서 불꽃이 튀는 장면도 간간이 비치곤 했다. 아무리 봐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생전 본 적조차 없는 거대 토네이도가 몇십 개나 생겨나 전국을 들쑤시고 있었다. 시뻘건 색의 번개가 사방으로 내리꽂혔고, 쌀알부터 골프공만 한 것까지 다양한 크기의 우박이 정신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박이 내리지 않는 곳은 민가 지붕을 날려버리는 거센 바람이 휩쓸고 있거나, 2층 높이까지 순식간에 차오르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오른편에 앉은 앵커가 팔꿈치를 툭 치는 바람에 수민은 멍하니 뒤쪽 중계 화면을 보던 시선을 돌려 정면의 카메라를 응시했다. 프롬프터에 올라오는 멘트를 앵커가 차분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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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email protected]

    소설가

    필자는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하고 신소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소설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로 2022 문윤성SF문학상 중단편가작을 수상했다. 소설집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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