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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규율의 힘 官軍보다 강한 僧軍 만들었다

임용한 | 24호 (2009년 1월 Issue 1)
개인의 삶이건 전쟁이건 경영이건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는 바로 미래의 상황이 예측 불가능할 때다. 여기에 낙관적 전망과 비관적 전망이 교차하면 의사 결정권자들은 더욱 잠을 이루기 어렵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4개월이 지난 1592년 8월은 총 7년의 전쟁기간 가운데 가장 혼란스럽고 초조한 시기였다. 서울과 평양이 점령 당하고 관군은 궤멸상태였다. 중국 망명을 결심한 선조는 신하들이 결사적으로 말려 간신히 국경인 의주에 머물러 있었다. 유일한 희망은 명나라 원병이었지만 명의 태도는 불분명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전라도 해역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대승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 승리가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단하기는 어려웠다. 조선 수군에 의해 해상 보급로가 차단된 왜군은 식량 공급에 차질이 생겼으며, 이로 인해 더 이상 북진이 어려웠다. 이에 왜군은 육로로 곡창인 호남 지방을 노린다. 일본 육군의 호남 진입을 막느냐 허용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성패가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선과 일본 양측 모두 이 순간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이 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행동은 따로 놀거나 집중하지 못하는, 그래서 정말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그런 상황이었다.
 
지도력과 조직력 갖춘 승군
일본군은 이 중요한 작전에 역량을 집중하지 않고 전체 일본군 가운데 제일 허약한 부대에 호남 공략 임무를 맡겼다. 조선군은 호남의 중요성을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호남 방어에 나선 조선군은 충청도와 전라도 군대였다. 하지만 이미 무모하게 서울을 수복한다고 상경했다가 지금의 과천 부근인 광교산 전투에서 대패한 뒤였다. 이 작전을 지휘한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모두 백면서생이어서 전술과 군대운용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낙담해 있는 윤선각에게 공주 목사 허욱이 찾아와 승려 한 명을 천거했다. 의병 모집에 자원한 공주 갑사의 청련암 승려 영규가 이미 자발적으로 휘하의 승려 9명을 이용해 적정을 탐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선각은 영규를 만났지만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체격은 건장했지만(다른 기록에 따르면 보통 사람보다 갑절로 컸다고 한다. 당시 평균키가 150cm대였으니 다소 과장하면 180190cm대의 체격으로 추측된다) 윤선각은 이미 광교산 전투에서 장수의 지휘 능력과 전투 능력은 별개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대화를 나눠봤지만 윤선각 입장에서는 남다른 점을 찾기 어려웠다. 사명대사와 같은 학승 출신이 아닌 영규는 사람 이름이나 겨우 읽는 수준이었다. 그가 탐지했다는 정보에 대해 물었지만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보통 때 같으면 틀림없이 낙방인 면접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영규를 승병대장으로 삼는다는 임명장을 줬다.
 
임명장을 받은 뒤 승병을 모집한 영규는 수 천 명을 규합했다. 영규가 모은 승병들이 모두 낫을 들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기본 무장도 안 된 병력이었다. 그러나 훈련을 시작한 지 열흘이 지나 상황은 놀랍게 변했다. 영규는 이들을 훌륭하게 조직했으며, 탁월한 지휘력도 발휘했다. 승병들은 관군과 의병 그 어떤 부대보다도 군대답게 행동했으며, 실전에서 큰 능력을 발휘했다.
 
든든한 부대를 얻은 윤선각은 충청도 방어사 이옥의 부대와 영규의 부대를 이용해 청주성 탈환작전을 시도한다.
 
영규 부대가 선봉이 돼 청주성 서문 앞에 진을 쳤다. 전투 경험이 있는 지휘관은 행군하고 진을 치는 모습만 봐도 군대의 수준을 안다. 병법의 정석 중 약한 부대를 먼저 치라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왜군의 눈에는 관군이 더 형편없어 보인 모양이었다. 왜군은 관군을 먼저 공격했다. 관군의 지휘를 맡은 수령들이 겁을 먹고 내빼려 하자 영규는 자신이 짚고 있던 선장을 휘둘러 수령의 등을 치면서 “평소에는 고기만 먹으며 지내더니 지금은 도망칠 생각만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조선시대에 승려가 수령에게 매를 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광경을 본 이웃 고을 수령이나 보고를 받은 관찰사 모두 상황이 상황인지라 영규를 비난하지 못했다.
 
관군이 연기 쪽으로 후퇴하자 영규 부대만 남았다. 영규는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삼면으로 진을 치고 버텼다. 기록에 따르면 수비만 한 것이 아니라 간간이 정예병을 보내 적을 공격하며 괴롭히기도 했다. 이는 영규의 지도력과 승군의 조직력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다. 웅크리며 수비만 하면 결국은 무너진다. 공격 측에서는 수비 진영 전면을 고르게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분을 집중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비 측에서도 공세를 취해야 이 압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이 없거나 결단력이 부족한 지휘관은 이런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다. 또 훈련이 안 된 부대는 공격을 감행할 용기를 내기도 어렵지만 어설프게 공격하다가는 조직력 부족으로 통제력을 잃거나 쉽게 와해될 수 있다. 사실 관군은 여러 전투에서 이런 실패를 맛봤다. 상대인 왜군은 너무나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흘 동안의 훈련기간을 지낸 승병부대가 왜군을 상대로 이런 전투를 감당했다는 것은 정말로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영규 부대가 간신히 막아내고 있던 전투는 의병장 조헌이 거느린 1700명의 의병이 가세하면서 전세가 역전된다. 조선군은 공세를 강화했으며 닷새 동안 공성기구까지 동원해 성벽을 공략한 끝에 청주성을 탈환했다. 요즘은 이 전투가 많이 잊혀졌지만 당시로서는 충격에 가까운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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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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