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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멸망한 진짜 이유

임용한 | 25호 (2009년 1월 Issue 2)
1920년 중국 뤄양시 주택개발지역 철거물에서 글이 새겨진 돌 하나가 발견됐다.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묘지명이었다. 의자왕과 부여융은 백제 멸망 후 당나라군에 의해 당나라로 압송됐다.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얼마동안 생존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사망해 유명한 북망산에 묻혔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그 지역은 돌궐 등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외국 군왕들이 묻힌 지역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외국인 묘역이다. 따라서 의자왕의 묘 역시 부여융의 묘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도 몇 번에 걸친 탐사와 의자왕의 묘를 찾았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의 묘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는 개발 과정에서 파괴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대신 2008년에 부여융의 증손녀 부여태비의 묘지명이 발견됐다. 그녀는 당나라 고조 이연의 증손자인 곽왕 이옹과 결혼했다고 한다. 이 사실로 미뤄보면 당나라로 잡혀간 의자왕 일가는 험악한 포로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왕족 대우를 받으며 산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 멸망의 원인과 의자왕의 책임
그렇다고 해서 마음까지 편했을까. 당나라에서 보낸 생의 남은 기간에 의자왕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하는 물음을 수없이 묻고 되뇌었을 것이다. 물론 백제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당나라 침공이었다. 그러나 과거 외환위기나 요즘의 금융위기처럼 외부적 요인이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그것이 완전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위기 대처라는 측면에서 보면 누구나 반성할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가 내놓은 답은 다음과 같다. 의자왕은 세자 시절에 형제들과 화목하고 부모에게 효도해서 ‘해동증자’로 불렸다. 또 결단력이 있고 과감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왕이 되자마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신라에 대규모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의자왕이 교만해져서 방탕과 사치에 빠지고 충신과 충언을 멀리한다. 의자왕 15년 의자왕은 궁을 화려하게 리모델링하고 음란하며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이듬해 좌평 성충이 극렬하게 이를 말리자 화가 난 의자왕은 성충을 투옥하고 당나라 침공을 경계하라는 성충의 상소를 무시했다.
 
그러나 이 기록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해동증자라고까지 불리던 인물이 그렇게 쉽게 타락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의자왕의 사생활이 좀 문란해졌다고 하지만 그것이 백제가 망할 정도의 폭정은 아니었다.
 
무엇이 진실일까. 삼국사기의 기록은 의자왕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보도일까?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다만 삼국사기는 유가 관점에서 쓴 역사책이어서 사건의 배경이나 사회적·환경적 요소는 제거하고 지도자의 성품에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알맹이가 빠지고 타이틀만 남은 기사가 된 것이다.
 
서기 641년 의자왕이 즉위할 당시 백제와 신라는 운명적 결전이라고 할 만큼 사생결단의 공방전을 벌였다. 한반도 통일에 가장 근접한 나라는 고구려지만 수나라 및 당나라와의 연이은 전쟁으로 남하정책에 제동이 걸렸다.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저항하고 있었다. 성왕 때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면서 신라가 기습적으로 한성을 점거했다.
 
이 사건으로 한반도 내 힘의 균형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백제는 자신들의 옛 수도인 한성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최대 규모의 전투를 준비하던 성왕은 어이없게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살해됐다.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도 신라를 계속 밀어 붙였지만 결정적인 고비를 넘지 못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빠르게 성장했다. 시간은 안타깝게 흘러갔지만 백제는 쉽게 역전의 계기를 잡지 못했다. 한강 쟁탈전에서 신라는 전술적 우위에 있었다. 한강의 지류인 남한강은 신라 영역인 충주·단양 지역으로 뻗어 있다. 신라는 수로를 이용해 빠르고 쉽게 병력과 물자를 이송할 수 있었지만 백제는 육로로 이동해야 했다. 이것은 전술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백제 지배계급의 분열
더욱 치명적인 약점은 백제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성탈환전에 대해 백제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것이다. 백제의 왕족과 건국세력들은 만주의 부여와 고구려에서 이주해 온 집단이었다. 그들은 한강 유역의 세력과 연합해 백제를 세웠다. 그런데 한성이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함락당하면서 이들은 다시 웅진(공주)으로 이주했다. 수도를 옮겼으니 집권세력에도 변화가 일어나 웅진 주변 세력들이 권력 중추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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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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