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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슐리펜의 진격: 빛바랜 모험정신, 희생 키웠다

임용한 | 63호 (2010년 8월 Issue 2)
 
▷이 글은 동아비즈니스리뷰(DBR) 62호(8월1일자) 67∼69쪽에 실린 ‘, 회전문 전략으로 강국과 맞서다’란 아티클의 후속편입니다.
 
17호 계획
 
슐리펜 계획이 성공하려면 세 가지 예측이 적중해야 했다. 첫째, 전쟁이 시작되면 프랑스가 바로 공세로 나와 줘야 한다. 그것도 독일이 예측한 지점으로. 둘째, 러시아군이 전쟁을 개시하는 데 6주가 걸려야 한다. 셋째, 독일의 보급 부대와 운송 능력이 53개 사단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이 제일 먼저 충족됐다. 1870년 보불 전쟁 패전 후 프랑스 참모부는 독일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신중한 계획을 세웠다. 공격을 받으면 요새화된 전선에서 최초 방어를 실시하다가 결정적인 역습을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이 좁기 때문에 방어에 유리했다. 1차 세계대전 후에 이 전선에 마지노선이 설치됐지만, 마지노 요새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프랑스는 이곳에 상당히 강한 참호와 요새선을 구축했다. 프랑스는 자체 전력만으로도 독일보다 강했고, 포병 전력은 거의 2배였다. 여기에 영국과 러시아까지 가세하고 전선에서 지구전이 시작되면 독일은 모든 면에서 가망이 없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자 프랑스군 내부에서 이 전쟁 계획에 대한 격렬한 반대 의견이 일기 시작했다. 이런 수동적인 계획은 프랑스 정신에 위배된다는 게 비판의 요지였다. 엄밀히 따진다면 공격적인 계획과 수동적인 계획이라는 구분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굳이 구분한다면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계획과 덜 유리한 계획, 불리한 계획이 있을 뿐이다. 프랑스의 정신이 “적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싸운다는 것”이 아닌 이상, 계획이 공격적이냐 수동적이냐를 논하는 것도 프랑스 정신과 무관했다. 그러나 보불전쟁 패배에 대한 프랑스인의 자괴감과 이 시대를 휘어잡은 민족주의의 광풍은 이 이상한 조합을 참모부에 강요했다. 결국 1912년 17호 계획이라고 명명된 수정안이 통과됐다. ‘독일이 도발하면 바로 반격해 독일의 영토로 진입한다. 그리고 보불전쟁의 패배로 독일에 뺏긴 알자스-로렌 지방을 탈환한다.’ 슐리펜의 회전문 전략이 마침내 빛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 수정안이 없었더라면 독일은 전쟁을 감행할 용기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프랑스의 한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무분별한 것이 용기 있는 게 됐다.”
 
몰트게의 동심원
 
1914년 독일군 우익이 벨기에를 침공했다. 벨기에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독일군의 진격은 예상 외로 지체됐다. 그러나 그 뒤로는 거의 무인지경이었다. 매일 들어오는 놀라운 진격 속도에 독일군 수뇌부는 격앙됐다. 진격 35일째 독일군은 파리 국경 50km 앞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이 진격은 슐리펜의 구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슐리펜의 후임 참모총장 몰트게는 슐리펜의 원안을 여러 군데 수정했다. 좌익의 약화가 걱정됐던 그는 슐리펜의 유언을 잊고 6개 사단을 빼서 좌익으로 돌렸다. 다른 이유로 다시 7개 사단을 뺐고, 4개 사단을 러시아 전선으로 돌렸다. 여담이지만 러시아와의 전투는 이 증원사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끝났다.
 
원래 슐리펜의 진격로는 벨기에와 네덜란드까지 침공해서 파리의 바깥쪽을 싸는 커다란 원이었다. 그러나 국제 분쟁을 우려해 네덜란드 침공을 포기하고, 벨기에로 한정하는 바람에 진격로에 정체현상이 일어났다. 병력이 줄어들다 보니 원래의 동심원을 감당할 수 없었다. 병력 부족으로 진격로가 길어질수록 군과 군 사이가 너무 벌어졌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이 간격이 신경 쓰였고, 결과적으로 진격을 거듭할수록 자꾸 가까이 붙게 되면서 몰트게의 동심원은 원안의 반 정도로 축소됐다.
 
이 계획에서 제일 중요한 부대는 최우측, 즉 가장 바깥쪽에서 돌아야 하는 부대였다. 그런데 몰트게가 이곳에 배치한 1군은 최정예 사단이 아닌 민간에서 갓 소집한 예비군 부대였다. 사령관 폰 클루크는 68세의 노장으로 성격은 불같고, 부하들에게 가혹하지만 작전의 진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부하들을 닦달했지만 훈련이 부족한 1군은 하루에 30km씩 진격하는 행군을 이겨내지 못했다. 보급도 충분하지 못해 그들이 파리 50km 지점까지 도착했을 때는 거의 거지꼴이었다.
 
한편 프랑스군을 유인해야 할 독일군 좌익은 자꾸 병력을 증강 받아 25개 사단이 됐다. 공격해 들어오는 프랑스군은 겨우 19개 사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좌익을 담당한 루프레히트는 후퇴를 거부했다. 그는 프랑스군을 막았고 프랑스군은 저지됐다. 그러나 루프레히트의 승리가 프랑스군을 궤멸시키거나 프랑스로 밀고 들어갈 수준은 아니었다.
 
마른 전투
 
슐리펜의 낫 모양의 작전 계획은 상당히 약화돼 있었지만 프랑스군을 정신없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독일군 우익이 반원을 그리며 파리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 지휘관들은 넋이 나갔다. 그러나 독일군 지휘관들이 부대 간격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 보니 독일군 우익이 원래 계획대로 파리 서쪽으로 크게 돌지 않고, 파리 동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것이 치명적이었다. 프랑스를 크게 쓸어버려야 할 ‘낫질’ 혹은 ‘갈퀴질’이 ‘못질’로 바뀐 것이다. 독일군이 스스로 모여 주는 바람에 프랑스군은 모든 반격 역량을 한 지점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독일군은 파리에 주둔한 영불 연합군보다 병력도 더 적었고, 강행군과 보급부족으로 전투력은 뚝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독일군 좌익이 프랑스군을 저지하는 바람에 파리와 동부전선의 프랑스군 간 거리가 멀지 않게 됐다. 프랑스는 즉시 독일군 좌익과 대치하던 병력을 불러들여 반격작전에 가담시켰다.
 
지친 독일군 우익은 이제 그들의 두 배는 되는 병력으로부터 반격을 받게 됐다. 이 전투가 벌어진 지점이 마른강()이어서 훗날 마른 전투로 불린다. 이 전투는 사실 싱겁게 끝났다. 슐리펜 계획의 본질은 사방으로 뿌리는 별똥별처럼 프랑스의 뒤쪽을 넓게 휩쓸며 프랑스군을 분산시키고 동요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군 도중 독일군이 서로 붙다 보니 분산도 못 시키고, 그렇다고 완전히 가깝게 붙지도 못하게 됐다. 프랑스군이 반격을 시도하던 시점에서도 독일군 1군과 2군의 간격은 50km가 넘었다. 이미 병력상으로도 독일군을 압도했던 프랑스군은 독일군 각 부대를 저지하는 한편 남은 병력을 이 틈으로 밀어 넣었다. 이 부대를 발견한 독일군은 진격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이로써 슐리펜 계획은 좌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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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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