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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정복자 티무르, 피와 공포로 세운 ‘사상누각’

임용한 | 80호 (2011년 5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941 6 21, 구 소련의 사마르칸트에 있는 구르아미르에서 소련의 고고학자들이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 티무르(1336∼1405)의 무덤을 발굴했다. 구르아미르는 원래 티무르가 자신이 아끼던 손자 무하메드 술탄의 죽음을 추도하기 위해 지은 사원으로, 티무르 자신도 중국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떠났다가 병사 후 이곳에 묻혔다. 티무르의 관은 흑갈색 연옥으로 만들어졌으며 그의 아들, 두 손자 그리고 스승의 관과 함께 사원 안에 안치돼 있다.

티무르가 사망한 해가 1405년이므로,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는 이 사원이 5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굴되지 않았을 리는 없다. 하지만 이때 갑자기 발굴이 행해진 것은 스탈린의 명령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스탈린이 왜 티무르의 유골을 필요로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스탈린은 세계 정복을 꿈꿨던 티무르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티무르에 과도하게 집착했다고 한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상당히 엉뚱한 이유로 진행된 이 작업이 티무르 유골 발굴이란 뜻하지 않은 성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화려한 관은 당연히 도굴됐지만 그 관은 위장이었다. 티무르의 진짜 유해는 관 아래의 땅 4m 지하에 묻혀 있었다.

티무르는 20대에 대상을 습격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오른쪽 다리와 오른 팔에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 후유증으로 티무르는 절름발이가 됐다. 구르아미르에서 발견된 티무르의 유골을 살펴본 결과 유골의 오른쪽 다리가 불구(양쪽 다리 길이가 달랐음)였고 오른 팔에도 상처를 입은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잔혹한 정복자 티무르

티무르는이라는 뜻이다. 칭기즈칸의 본명 테무친도 단단한 쇠라는 의미다. 결국 칭기즈칸의 이름을 본 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티무르는 자신을 칭기즈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트란속사니아(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서 작은 부족의 족장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이 지역은 몽골이 세운 차가타이한국(칭기즈칸이 네 왕자에게 분봉한 사한국 중 하나)의 지배 아래 있었다. 당시 차가타이한국은 정치적으로 분열돼 있었고 이 지역의 유목민족들 역시 서로 반목하며 갈등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영웅이 출현할 환경이 조성돼 있었던 셈이다. 티무르는 이 난세에 용병, 강도, 약탈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바꾸며 유목민 부대의 전술과 생리를 바닥에서부터 터득해 나갔다.

그는 살벌하고도 잔혹한 현실주의자였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기만, 모략, 배신, 암살, 학살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트란속사니아의 통치자인 아미르 카즈칸이 1357년 사망하자 카슈카르의 칸 투글루 테뮈르가 트란속사니아를 침략(1361)했다. 그러자 티무르는 즉각 테뮈르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그의 신하로 들어갔다. 티무르의 능력을 알아본 테뮈르는 자신의 아들 일리아스 호자를 트란속사니아의 새 총독으로 임명하고 티무르를 호자의 대신으로 중용했다. 그러나 얼마 후 티무르는 호자를 배신하고 트란속사니아의 정복전에 착수했다. 이때 그의 협력자가 아미르 카즈칸의 손자이자 처남인 후사인이었다. 티무르는 후사인과 손잡고 1366년 호자로부터 트란속사니아 정권 탈취에 성공한다. 이어 티무르는 트란속사니아를 손에 넣기 위해 의형제까지 맺었던 후사인을 급습해 암살하고 자신이 유일한 주권자로 등극한다. 심지어 후사인의 부인이었던 사라이를 아내로 취한 그는사라이는 칭기즈칸의 후예이므로 자신은 칭기즈칸의 사위가 된다고 주장했다.

인도 원정

평생에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티무르의 화려한 전적 중 최고의 압권은 인도 원정이다. 그는 인도 정복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인도로 들어갔다. 실제로는 몇 번 정복당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이 정복된 적이 없는 땅으로 알려진 이유는 끔찍한 지형과 험악한 날씨 탓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악명 높은 곳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에 놓인 힌두쿠시 산맥이다. 이 산맥은 해발 6000m로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넘은 알프스의 고갯길보다도 더욱 험한 곳이었다. 티무르는 이 지역에 사는 사나운 카피르족을 설득해 이들의 안내를 받아 힌두쿠시 산맥을 넘었다. 카피르족을 안심시키기 위해 산맥을 넘을 때 그는 소규모 부대만 거느렸다. 그리고 눈사태를 피하기 위해 눈이 얼어붙은 밤에만 행군을 했다. 간신히 산맥은 넘었지만 말을 모조리 잃었다. 중앙아시아의 기병이 보병으로 전락한 셈이다. 이제 티무르는 카피르족의 위협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 공격을 당하거나 인도군에게 넘겨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티무르는 산을 넘자마자 방심하고 있는 카피르족을 급습해 그들을 전멸시켰다. 그리고 산맥을 되돌아가 주력 기마부대를 다시 끌고 인도로 들어왔다.

인도군의 자랑은 코끼리 부대였다. 전투용으로 사납게 훈련된 코끼리는 기병에 특히 강했다. 말은 자신보다 큰 동물을 보면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동물에게 공통된 특성이어서 코끼리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코끼리보다 큰 동물이 없었다. 티무르는 살아 있는 낙타에 기름을 바르고 불을 붙여 코끼리 부대로 돌격시켰다. 비명을 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불붙은 낙타를 보고 코끼리들은 놀라 무너졌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행동은 결코 칭찬할 만한 미덕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장점이라면 이런 악질적 행동을 선택하는 기준이필요하다면이 아니라가장 적절할 때였다는 점이다. 음모와 비겁한 행동은 나름의 중독성이 있다. 이 비겁함에 한번 중독되면 정면대결과 같은 위험한 승부보다는 이런 방법이 손쉽게 느껴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방식에 숙달되고 능력이 이 방면으로 집중되기 때문에 정공법을 수행할 능력과 자신감이 계속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티무르는 이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교활하고 사악한 만큼 정공법에도 강했다. 전쟁터에서 상대의 전술을 예측하고, 적이 예상치 못한 전술로 대응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적에게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가혹했지만 자기편에겐 자비로웠다. 이런 양수겸장의 능력이 그를 초원의 패자로, 칭기즈칸의 뒤를 잇는 대제국의 황제로 만들었다.

심리전의 대가

다른 정복자와 달리 티무르는 정복 지역에 관리를 남겨두지 않았다. 그는 정복지를 약탈하고 바로 떠났다. 그가 떠나면 당연히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면 다시 돌아와 정복하고 약탈했다. 그래서 그의 군대에게는 싸울 곳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약탈은 큰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쉴 새 없이 계속되는 전투를 지겨워하지 않았다. 정복과 약탈을 반복할수록 그의 군대는 점점 더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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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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