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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경영:삼국지 리더십

다이아몬드 모델로 분석한 삼국지 영웅의 리더십

김태현 | 86호 (2011년 8월 Issue 1)
 

 
소설은 우리를 자신 밖으로 끌어내고 우리와 다른 많은 인물들을 만나게 한다. 우리는 <삼국지>를 통해 2000여 년 전 넓은 중국 땅을 무대 삼아 자신의 뜻과 꿈을 펼쳐왔던 영웅호걸들을 만날 수 있다. <삼국지>를 통해 그들의 숨결을 느끼고 오랜 전란의 와중에서 살아간 무수한 사람들의 삶의 역정과 희로애락도 느낄 수 있다. 부채를 흔들면서 천하를 논하는 전략의 대가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적토마에 몸을 맡기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광활한 중원 땅을 달리는 관운장(關羽)의 멋진 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매료된다.
 
소설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도 가르쳐준다. 경영 관점에서 보면 <삼국지> 속의 전장은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인 오늘의 비즈니스 현장과도 흡사하다. 경영자의 리더십에 따라 기업들의 부침이 있듯이 <삼국지>의 나라들도 리더의 역량에 따라서 흥망이 확연하게 갈라졌다.
 
원소(袁紹)는 조조(曹操)나 유비(劉備)보다 훨씬 큰 세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기반을 지키지 못하고 쉽게 무너졌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넓은 영토와 훌륭한 인재들을 대거 거느리고 있었지만 오만 방자한 성품 때문에 초기에 패망했다. 반면 조조, 유비, 손권(孫權)은 각각 다른 리더십을 가졌지만 국가를 훌륭히 경영해 나라를 반석 위에 세웠다. 조조, 유비, 손권의 국가 통치방식은 오늘날 기업 CEO들이 모범 사례로 삼을 수도 있고 때로는 반면교사로서 우리를 일깨워 줄 수도 있다.
 
국가경쟁력 모델
조조, 유비, 손권의 리더십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한 모델은 하버드대의 마이클 포터(Michael Porter) 교수와 서울대 경영대학의 조동성 교수가 연구한 ‘국가경쟁력 모델’이다. 국가경쟁력 모델에 따르면 국가 경쟁력은 해당 국가의 내부 요인인 인적 요인, 물적 요인과 외부 요인인 기회의 세 가지 요인들에 따라 결정된다.(표 1) 그중에서 인적 요인은 정치인/행정가, 기업가, 전문경영자, 근로자 등 네 가지 집단의 사람들로 구성되고 이들의 능력이 국가경쟁력에 영향을 미친다.
 
<삼국지>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정치인/행정가, 기업가, 전문경영인 중 하나로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어 하나의 집단으로 생각했다. 삼국시대 당시 고위직 관리들은 다양한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갈공명도 정치인/행정가와 기업가, 전문경영인 역할 모두를 수행했다. 다만 근로자는 병사와 백성으로 생각하고 분석했다.
 
물적 요인은 4가지로 구성되는데 물적 자원, 경영환경, 관련 산업, 국내 수요가 그것이다. 물적 자원은 부존자원이나 기술력 같은 나라의 자원을 말하며 경영환경은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 있는가를 나타낸다. 관련 산업은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산업의 종류와 산업 구조를, 국내 수요는 국내 수요의 크기와 성장성, 소비자의 욕구성향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물적 요소들도 나라의 리더인 조조, 유비, 손권의 리더십에 따라 더욱 활성화되거나 퇴보할 수도 있다. 마지막 한 가지 요소는 외부 요인인 기회(opportunity)인데 기회 요인은 리더의 통제 범위 밖에 있다고 가정하고 본 글에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조조의 리더십
타고난 자질과 부지런함으로 자신을 단련했던 조조는 현대의 경영환경에 적합한 경영자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조조는 몸소 전장을 누비며 싸움을 주도했다. 어떤 때에는 정면 승부로, 어떤 때에는 꾀와 외교로, 또 어떤 때에는 위계와 사술로 적을 하나씩 물리쳤다.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조조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말에서 내려와서도 천하를 다스렸다. 조조는 한발 앞서 생각하고 기민하게 판단하고 실행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조조는 명분보다 능력을 우선시한 실용의 경영자 스타일이었고, 위대한 전략가이면서 행정가이고, 또 시인이었다. 조조는 계속 공부해 본인을 업그레이드시켰고 이를 자신의 강점으로 만들어나가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또 조조는 인재 등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조는 유비와 손권까지도 자신의 수하로 두고 싶어 할 정도로 인재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조조는 인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재를 찾아 나섰다. 위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가후(賈詡)와 사마의(司馬懿)는 조조가 위나라의 장래를 위해 미리 포석해놓은 사람들이었다. 제갈공명이 후주 유선(劉禪)에게 출사표를 바치고 위나라 북벌에 나섰을 때 사마의가 없었더라면 위가 상당한 곤경에 처했을 수도 있었다. 비록 적이지만 관운장을 수하로 거두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서도 인재에 대한 조조의 갈구가 대단했음을 볼 수 있다. <삼국지>를 보면 조조의 진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무장, 문인, 모사, 관료 등 나라 경영에 필요한 온갖 유형의 인물들이 즐비하다.
 
위나라가 강성해진 이유는 조조의 성공적 인사관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조는 일할 보람과 안정된 자리, 물질적 보상을 마련해주는 현대적 관리기법을 일찍부터 사용했다. 부하의 잠재력을 파악한 후 적절한 경력관리를 통해 인재를 육성해나갔다. 조조의 부하들 중에는 상위 전문가 그룹이 강하고 두터웠는데 이러한 인재들이 위나라의 법령, 행정체계를 체계적으로 갖춰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인재 활용 시 조조는 원칙과 줏대를 세우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를 자주 보여줬고 의도적으로 적시에 사람들을 칭찬해 감동시켰다. 유비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관운장이 조조 곁을 떠났지만 “나의 정성이 모자랐다”라고 탄식해 주변 사람들과 관우를 감동시킨 일화도 있다. 조조는 유비나 손권보다 주도 면밀하게 사람을 다루고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조는 사후 대비 준비 또한 철저했다. 조조는 죽기 9년 전부터 후계 구도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조조는 후계자를 빨리 선정하지 않고 심사숙고했는데 능력을 기준으로 조비(曹丕)를 후계자로 낙점해 그를 냉정히 단련시켰다. 황제의 권한을 차츰 줄이면서 조비의 세력을 점차 키웠고 많은 인재를 붙여 조비를 뒷받침했다. 조조는 조비에게 훌륭한 인재풀과 시스템, 제도들을 남겨 위나라의 미래를 단단하게 하고 죽었다. 한국의 기업들도 최근 2세, 3세 경영자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조조처럼 후계자에 대한 철저함이 필요하다.
 
인적 요인에서 탁월함을 보였던 조조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조조가 인재를 중히 여긴 것은 맞지만 자신의 뜻과 다른 경우에는 가차 없이 처단하는 모습을 지닌 점에서다. 조조는 부하를 진정으로 발전시키는 리더십(Enabling leadership)과 윤리적 경영관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얻지 못한다. 조조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지만 자신의 뜻에 반대한다고 평생을 같이한 최고의 전략가인 순욱(荀彧)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살하게 했다. 어머니를 강제로 위나라로 불러들여서 유비 측 전략가인 서서(徐庶)를 유비로부터 떠나게 하는 모습에서는 냉혹함도 보인다. 조조는 용도가 있을 때는 사람을 지극히 아끼지만 용도가 끝나면 차갑게 대한다는 점에서 인정 많은 촉나라 유비와 다르다. 관운장을 자신의 옆에 두고자 천하의 명마인 적토마까지 하사했지만 그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 것도 이러한 조조의 한계 때문일지 모른다. 성격이 충직하고 곧은 사람들은 조조 밑에서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난세에는 도덕성보다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조조의 인재관이었기 때문이다.
 
물적요소에 있어서 조조의 리더십은 어땠을까? 위나라는 영토의 크기, 경제력, 국가 시스템, 문화적 수준에서도 유비의 촉나라와 손권의 오나라를 압도적으로 앞섰다. 위나라는 중국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상공업이 발달했고 자원도 풍부했다. 이러한 물적요소를 조조는 적절히 활용했다. 조조는 훌륭한 정치가이자 행정가로서 전란 중인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활안정이라고 생각했다. 계속된 전란 때문에 백성들은 안전한 삶과 생업을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조조는 버려진 땅을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수확량의 6할을 받는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했다. 국방문제에 있어서는 병호제(兵戶制)를 실시했다. 이는 병사를 일반 백성과 구별해 일선지역에 근무하면서 농사를 짓게 하는 제도이다. 아버지가 사망하면 아들이 그 뒤를 이어나가게 했다. 국가세입은 호조제(戶調制)라는 선진 시스템을 도입했다. 조조는 이와 같이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시스템을 과감히 도입해 국가의 경제력을 넓혀나갔다.
 
아울러 조조는 나라를 경영함에 있어 법에 의한 치국을 기본으로 삼았다. 조조는 원리원칙을 따지면서 법 집행에 엄격했다. 법에 따라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조조가 다스리던 나라는 기강이 잡히고 법치 강국이 될 수 있었다. 조조는 죽을 때까지 법가적 통치방식을 견지했다.
 
조조는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는 일뿐만 아니라 장래에 대비하는 일에도 신경을 썼다. 바로 교육과 문화정책이다. 전란으로 나라의 예의범절과 청소년 교육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해 그쪽에 특히 신경을 썼다. 지방 500호마다 학교를 설치해 재주 있는 청소년들을 교육시켰고 재주 있는 문인들을 휘하에 많이 끌어모아 각기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들은 중국 문화의 전성기를 이룬 건안문단(建安文壇)을 형성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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