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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묘청의 난 승자 김부식, 부하의 功 가로챘다

임용한 | 153호 (2014년 5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묘청의 난은 고려 왕조 당시 서경 천도파가 개경 문벌귀족에 대항해 일으킨 정변이다. 당시 정부군을 이끌었던 김부식은 난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고려 역사상 유래가 없는 포상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김부식 휘하에서 반란 진압에 힘썼던 또 다른 장군 윤언이의 상소문에 기초하면 김부식은 몇 가지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 사실 철옹성이라고 불리던 서경성이 함락된 데에는 윤언이가 화공 작전을 단독으로 감행한 공로가 컸다. 하지만 김부식은 서경성 함락의 공로를 대대로 가문끼리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윤언이에게 넘겨주기가 싫어서 화공작전 성공 직후 곧바로 성벽으로 진입하기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반란 진압의 최고 공로자 중 하나인 윤언이를 치하하기는커녕 좌천시키기까지 했다. 아랫사람이 자기보다 뛰어날 때 견제심리가 발동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진정한 리더라면 자신보다 뛰어난 부하도 자신을 위해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고려 왕조를 뒤흔들었던 묘청의 난(1135∼1136)은 흔히 술법을 사용하는 이상한 승려 묘청이 일으킨 반란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가리켜 금나라를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하자는 자주적 진취론자와 사대주의자 간의 전쟁이라고 묘사했다. 두 가지 해석 모두 다 틀렸다. 묘청의 난은 묘청이라는 교주가 종교적 열정을 이용해서 일으킨 난도 아니고, 자주파와 사대주의 간의 대결도 아니었다. 난의 배경은 서경(현재의 평양) 토호와 주민들의 오랜 불만과 억눌려왔던 성장 욕구가 터지면서 발생했다고 봐야 한다. , 서경에 있는 자신들의 지위가 개경에 이은 제2의 수도라는 지위를 보장받지 못하고 점점 지방 세력으로 밀려나가는 데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묘청은 속된 말로 이야기하자면 일종의바지 사장이었다. 반란이 초기에 실패하고 정부군이 진입하자 서경의 반군은 바로 묘청의 목을 잘라 정부군에 바치고 항복했다. 그렇게 쉽게 끝날 반란이었는데 서경의 행정책임자가 실수를 해서 묘청이 죽었는데도 정부군이 서경 주민을 학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서경이 2차 봉기를 한다. 진짜 묘청의 난과 치열한 전투는 묘청이 죽은 후에 진행됐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 그런지 대부분의 방어거점이 산성이다. 도시에 있는 성은 행정구역을 표시하는 담장 역할밖에 못한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도성, 읍성은 버리고 산성으로 피해 농성을 벌인다. 하지만 예외가 되는 성이 몇 개 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성, 수많은 전투를 겪었던 역전의 성이 바로 서경성이다.

 

철옹성과 다름없던 서경성

서경성은 무수한 전쟁을 이겨 왔다. 삼국시대 때는 수나라 군대와 당나라 군대가 몇 번을 포위했지만 성을 함락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마지막에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이 되기는 하지만 그때는 고구려가 이미 탈진 상태였다. 거란전쟁 때도 서경성은 두 번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한 번도 함락되지 않고 굳건하게 버텼다.

 

서경성이 이토록 철옹성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던 이유는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교묘한 입지 덕분이다. 성의 남쪽 부분은 대동강이 막고 있다. 동쪽은 하안단구(河岸段丘)로 형성된 절벽이다. 동쪽과 남동쪽이 지형이 제일 험해서 공략하기 어렵다. 평소에는 관광명소가 되는 모란봉과 을밀대는 동쪽 산지에 조성한 성의 중심부다. 성은 삼중성으로 돼 있는데 묘청의 난 때는 외성은 허물어져 중성과 내성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외성은 너무 넓고 방어력이 약했다. 내성은 비상용 차단막 같은 것이라 어차피 전쟁을 대비한 구조물은 중성이 핵심이었다.

 

우리나라 성은 일반적으로 성벽이 낮다. 조선시대 조사에 의하면 평지에 세워진 성의 경우 성벽 높이가 3∼4.5m 정도에 불과했다. 산성은 그나마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성벽이 낮아도 산 자체가 보호해 주지만 평지성의 경우엔 최소한 6m는 넘어야 적정한 방어력을 갖출 수 있다. 이 정도 높이는 돼야 운제(사다리차), 공성탑 등의 공성구가 공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대부분 평지성의 경우 이에 훨씬 못 미치는 높이이다 보니 외부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 끝난 후 유성룡은 성벽이 낮아 성이 무용지물이었다고 개탄하며 성벽 높이기를 주장했지만 이는 구한말까지도 잘되지 않았다. 낮은 성벽 높이 말고도 문제는 많았다. 당연히 고려나 조선시대에 건조된 성은 시멘트처럼 성능 좋은 접합제 없이 돌을 켜켜이 쌓아 올려 건축한다. 따라서 성벽이 높아지면 그만큼 무너지기도 쉽다. 물론 안 무너지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아주 엄청난 노력을 들여 정교하게 쌓아야 하고 매년 유지 보수를 철저히 해야 했는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경성은 제일 약하다는 외성의 성벽 높이가 무려 10m나 됐다. 외성 구역은 경작지여서 외성까지 확실히 지켜낼 수 있으면 전쟁이 벌어져도 농사까지 지으며 버틸 수 있는 상황이 된다. 물론 묘청의 난이 벌어졌을 때 반군은 외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식량은 충분히 비축했다. 기록에 따르면 반군들은 1년 이상은 버틸 수 있는 식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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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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