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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에서 배우는 경영

곡식도둑 참새 소탕나선 中 메뚜기 넘쳐나 대기근 겪다

서광원 | 155호 (2014년 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미국 미주리 주 산림당국은 새들이 어린 참나무의 수액을 빨아 먹어 성장을 저해한다고 판단하고 새가 참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보호용 그물을 설치했다. 그랬더니 그물을 설치한 참나무가 그렇지 않은 참나무보다 성장이 오히려 더뎠다. 사실 참나무의 수액을 빨아먹는 것은 새가 아니라 곤충이었다. 새는 수액에 몰려드는 곤충을 잡기 위해 참나무에 접근했다. 참나무에 그물이 설치돼 새의 접근이 어려워지자 어린 참나무에는 곤충이 몰렸고 곤충들은 참나무의 성장을 이전보다 더 어렵게 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특히 리더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 이면에 가려진 본질을 읽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오판하지 않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리더에게는 본질을 꿰뚫는 혜안이 필요하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지만 여름이 가까워진다 싶으면 어느 순간 찾아와 처마 밑에 둥지를 트는 녀석이 있다. 바로 흥부전을 드라마틱하게 만든 제비다. 제비들은 초여름과 함께 오고 추위와 함께 사라진다. 이 녀석들은 도대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4세기에 쓴동물의 역사(Historia Animaltum)’에서는 제비들이 추운 겨울이 되면 추위를 피해 땅속으로 숨는다고 했다. 개구리나 곰처럼 겨울잠을 잔다는 것이다. 물속을 들락날락할 수 있는 지빠귀는 물 아래의 땅속에서 잠을 잔다고 했고 커다란 황새는 속이 빈 나무 속에서 겨울을 보낸다고 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심지어 2000여 년이 지난 18세기까지 이런 믿음은 굳건했다. 과학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던 때였지만 학자들은 9월 초가 되면 제비들이 겨울잠을 자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기록까지 남겼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따뜻한 남쪽나라로 이동한다는 주장이 조금씩 설득력을 얻어갈 때에도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은 학자도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일부는 남아서 겨울 동안 우리 곁에서 숨어 지낸다.”

 

어느 순간 하나둘 떠나기 시작해 워낙 먼 곳으로 이동하니 어디로 가는지 몰랐던 것이다. 맨눈으로만 보던 시대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첨단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볼 수 있는 것만, 보여지는 것만 보는 까닭이다. 다행히 이런 믿음은 믿음으로 끝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다르다.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인식이 잘못되면 가혹한 대가가 따르기도 한다.

 

미국 미주리 주에서 큰 산불이 일어나 산이 모두 타버렸다. 산림당국은 벌거숭이가 된 산에 참나무 숲을 조성하기로 했다. 참나무는 재질이 단단한데다 숯을 만들 수도 있어 여러 모로 쓰임새가 많다. 어린 참나무들을 심어놓고 보니 방해꾼이 있었다. 달콤한 수액을 먹느라 참나무를 수시로 쪼는 새들이었다. 아무래도 이 새들 때문에 어린 참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가 없겠다 싶어 사람들은 새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일론으로 된 그물을 예산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참나무에 하나씩 씌어줬다.

 

한참 후 어린 참나무들이 얼마나 컸는지 점검하러 간 삼림당국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애써서 그물을 쳐준 참나무들은 자잘한 잎만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둔 참나무들은 그물을 친 참나무에 비해 두 배나 되는 큰 잎을 달고 있었다. 잎 크기와 잎 개수 모두 두 배였다. 다음해가 되자 차이는 키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냥 놔둔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는데 보호용 그물을 쳐줬던 나무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알고 보니 보호용 그물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참나무를 못살게 구는 건 새들이 아니라 딱정벌레 같은 곤충이었기 때문이다. 곤충들이 참나무 수액을 줄기차게 빨아먹고 있었는데 눈에 잘 보이지 않은 탓에 덩치가 커서 눈에 잘 보였던 새들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썼던 것이다. 억울한 누명이라고 한 것은 새들이야말로 어린 참나무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들은 수액에 몰려드는 곤충을 사냥했다. 이런 새들을 못 오게 했으니 곤충들은 천국을 만났고 어린 참나무들은 지옥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별 생각 없이 쉽게 믿어버린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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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광원[email protected]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필자는 경향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경영 전문 기자로 활동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대한민국 리더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비롯해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사자도 굶어 죽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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